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이 책의 주된 목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바르고 정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배관도, 급수펌프장도, 정수장도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더불어 세계화의 거센 물결을 타고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보편화되고 있는 서양문명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떠맡긴 심각한 문제들 – 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 에 대한 해법도 찾기를 기대하지요.(8)
1부 신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첫번째 이야기는 이 위대한 천장화의 한 장명인 ‘아담의 창조’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천장화를 보고 경탄하던 사람들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대부분 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이 천장화의 그림속 노인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요? 신은 정말 미켈란젤로가 그린 것처럼 백발성성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22)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나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신의 모습입니다. 과연 신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신과 관련해 여느 것과는 달리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하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신은 그러합니다.
“신이 영이라는 말은 신이란 모든 것에 침투하는 바람, 때로없 조용한 숨결로 때로는 ㅂ센 폭풍으로 모든 것에 침투하여 지배하는 바람이다는 뜻이다” -독일의 현대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신을 ‘보았다’는 구약성서의 기록들은 신의 본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과 위엄의 상징을 보았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경전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신이 자기를 현현하는 한 방법으로서 사자로 나타난 것일 뿐 신이 가진 본래의 모습은 아닙니다. (28)
앞으로 당신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게 있습니다. 신은 전혀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오해하거나 전혀 이해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32)
미켈란젤로가 그린 노인은 누구인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노인은 야훼가 아닌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피테르라는 라틴어로 부르던, 이 그리스 신들의 왕을 거리낌 없이 야훼와 같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신을 그들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그래서 단테는 신곡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인 야훼를 유피테르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켰고, 미켈란젤로는 성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라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를 그리스.로마인들의 정신과 기법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인간의 몸을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여기고 그것에 열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신에게 인간의 육체를 부여한 것은 신들을 폄하했다기보다 인간의 육체를 그만큼 신성시했다고 보아야 하지요.(36)
인류역사를 두고 인간의 육체를 이처럼 신성화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렇듯 건강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미켈란젤로가 그대로 이어받았지요. 바로 그 정신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육체를 다듬었습니다. 고대나 중세 기독교에서 인간의 육체는 언제나 욕정과 죄의 온상이기 때문에 숨기고 가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나체들은 전혀 다릅니다. 그가 그린 육체들은 그리스의 조각 작품이 그렇듯 모두 건강하고 빼어난 균형과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천지창조>를 완성한 후 거의 30년이 지났을 때 미켈란젤로는 또다시 성 시스타나에 거대한 나체 성화를 그렸습니다. 1541년에 완성된 <최후의 심판>입니다. 원래는 성모와 예수를 제외하곤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나체들의 천국이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가진 중세 이탈리아의 예술가였습니다. (40)
에로스의 날개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에서는 감각의 미를, 정신에서는 이데아의 미를 찾아내 조화시키려 애썼습니다. 감각의 미는 그들 작품에 자연스러움을 심어 주었고, 이데아의 미는 숭고함을 보탰지요. 그들은 인체를 조각할 때 수학적 비례, 조화, 균형을 지나치리만큼 엄격히 따졌습니다. “인간답게 묘사하되 동시에 이상화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이 견지한 최고의 규칙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바로 이러한 정신과 규칙을 애써 물려받았지요. 신 플라톤주의의 숭배자이기도 했던 미켈란젤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던 이데아의 미가 작품에서 물질성을 소멸시키고 인간의 영혼을 초월적 세계로 이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43)
플라톤은 아름다움이란 여인,신체와 같은 감각적 대상에서 나오는 게 아니며 그것은 단시 매개체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름다움은 오직 우리가 감각적 대상을 통해 상기(다시 기억해냄)하게 되는 지고한 신적인 형상의 아름다움, 곧 ‘이데아의 미’에서 나옵니다. 양 어깨에 날개를 난 나체소년(큐피트, 아모르라)은 에로스라고 합니다. 이 날개가 우리의 영혼이 단순히 감각적 대상에 머물지 않고 이데아의 미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신에게 상승하게 합니다. 즉 에로스는 우리의 영혼을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향하게 하는 ‘혼의 전향’을 가져오고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에서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을 향한 등정을 하게 되지요. (44)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탐구했고 라파엘로는 제자들을 그리스로 보내 고대 미술품들을 모사해 오게 했지요. 그 결과 성서 이야기를 다룬 이들의 작품에도 그리스 문화가 자연스레 혼합되었습니다.
신인동형설
고대 종교에서는 신인동형설과 신인동감설의 형태를 가진 신에 관한 이야기가 흔히 등장합니다. 인도신화와 그리스 신화가 대표적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신은 외모만이 아니라 내면까지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와서야 올림포스의 산과 인간의 형상으로부터 해방시켰지요. (48)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신을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라고 규정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을 축약해서 보통 부동의 운동자(=원동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변적 논리에서 세계의 궁극적 바탕으로서 자신은 탄생하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탄생과 변화의 원인이 되는 무형의 원리를 가정해 ‘부동의 운동자’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신이라고 했지요. 즉 제우스나 아폴론 같은 유형의 그리스적 개념이 처음으로 ‘부동의 운동자’라는 무형의 자연 원리로 바뀐 겁니다. 즉 스승과 달리 그는 무형의 신 개념을 그리스 철학 안에 최초로 확정한 계기였지요. (52)
구약성서는 처음부터 신에게 인간의 형상을 철저하게 지웁니다. 유대교는 물론이고, 기독교나 이슬람교처럼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모든 종교에서 신은 무형의 존재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적 예술가들을 통해 무형의 기독교 신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형의 신으로 다시 탈바꿈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하나의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52)
하지만 구약성서에 나오는 신에 대한 형상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사용된 ‘형상’과 ‘모양’이라는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형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첼렘은 원래 ‘그림자’라는 뜻이지요. ‘모양’을 의미하는 떼무트는 보통 ‘어떤 것과 닮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둘 모두 신의 ‘외적 형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내적 본성’을 뜻한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공통된 해석이지요. 이는 마치 그리스어 이데아와 에이도스가 본래는 어떤 사물이 ‘눈에 보이는 모양’, ‘형상’이라는 단순한 뜻이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세상의 모든 사물 안에 깃들여 있어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게끔 하는 실체’라는 매우 특별한 철학적 뜻을 갖게 된 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54)
신론과 존재론 그리고 서양 문명
신이 어떤 모습이고 무엇인지 아니면 누구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흥미롭지만 결코 단순한 작업은 아닙니다. 모세오경을 통해 계시되었고 히브리 선지자와 예언자들이 계승했으며,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정리했고, 중세 신학자들이 발전시킨, 이 신에 관한 이론은 장구한 역사적 산물인 데다 아주 독특하기 때문이지요.(55)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 당연히 신은 우주마저 포괄하며, 무소부재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신은 유일자다) 신은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신은 창조주다)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관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신은 인격적이다) (56)
여기서 모든 인간은 당연히 그의 말과 의지를 따라야 한다는 교리가 자연스레 파생된 것이지요. 그래야만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선하게 이루어져 그것을 복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역하면 반드시 파멸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자기파멸을 인간은 벌이라는 형태로 경험하게 되지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이러한 주장의 부단한 반복입니다.(57)
구약성서의 서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었을 때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던 신이 결국 그들에게 내린 벌은 죽음이 아니라 추방이었습니다. 신은 왜 자신의 선포를 스스로 어기고 즉각 죽이지 않았을 까요? 신이 곧 존재 라는 가르침에서 신을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상실, 곧 사망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일 뿐이지요. 신은 영이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은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킨 겁니다. 이처럼 성서는 낙원추방의 서사에서부터 존재론적 함축성을 이미 내포한 것이지요. (58)
다분히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이기도 한 이유로 신은 인간이 도무지 벗어나거나 떠날 수 없는 대상이며, 그의 ‘말씀’은 순종하면 필히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부득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59)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구약성서의 신처럼 공의를 내세우지도 않고, 인간보다도 도덕적이지도 않습니다. 애정과 증오에 대한 일정한 기준도 없어요. 그러니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지요. 마치 우리 인간의 감정이 그렇듯 말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축복과 징벌을 묘사한 글 안에는 인신동감적 요소와 묘사가 넘칠지언정 존재론적 함축성이나 표현들은 찾아보기가 어렵지요. 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축복과 징벌을 묘사한 작품에는(설사 그것이 은폐되었을것이라도) 존재론적 함축성을 지닌 종교적 상징과 표현이 반드시 포함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이 종교의 신이 자기 자신을 ‘존재’로서 계시했고 또 신학자들도 그렇게 파악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적 신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풀어 가며 서양문명을 코드로 사용하려는 이유입니다. ‘알면 믿는다’와 ‘믿으면 안다’라는 관점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당연히 후자를 견지합니다만 일단 알아봅시다.(64)
2부 신은 존재다
“있는 자”라는 이 명칭은 신의 가장 고유한 이름이다 – 토마너 아퀴나스 <<신학대전>> (68)
열 네살의 영특한 소년인 아퀴나스는 나폴리의 대학에서 자신의 생애를 바꾸어 놓을 두 가지 중요한 만남을 가졌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미니크 수도회였습니다. 이 도미니크 수도회 안에서 그는 평생 동안 한 손으로 <<성경>>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69)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다. 이 명칭 즉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탁월한 중세신학자들도 신이 인간처럼 생긴 게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바다’와 같은 모습이라고 인식했다는 사실입니다.
1장. 존재란 무엇인가?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고대사회에서 이름이 지닌 특별한 의미를 독일의 구약학자 발터아이히로트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은 사실상 일종의 또 다른 자기가 될 수 있었다.” 신의 이름 또한 예외가 아니었어요. 신이 무엇인지 알려면 “신이 어떤식으로 이름 불러지는지를 고찰해야 한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 그래서 나온 겁니다.(81)
구약성서를 보면 공교롭게도 신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라는 야곱에게 신은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라고 되물을 뿐 대답은 하지 않지요. 대체 신은 왜 그랬을까요? 강하고 전능하며 영원한 신이 왜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못한 것일까요? 성서에는 이에 대한 대답은 없지만 존재론적으로 따져보면, 그 이유가 단명하게 드러납니다. 신이 자기 이름을 감춘것은 사실 신에게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지요. (83)
신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자신의 속성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그 무엇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자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될 수 없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바깥에 있다면 빠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연학 뿐만아니라 형이상학에도 그대로 적용되지요. (85)
아우구스티누스는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신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의 이름을 지어 부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열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어렵게 알아낸 신의 이름이 야훼(YHWH)이지요.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존재’입니다. 만일 신에게 본질이 있어야 한다면 (= 신에게도 이름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존재’뿐입니다. (86)
신에 대한 이런 흥미로운 생각은 기원전 6세기 아낙시만드로스가 시작입니다. 탈레스의 동료였으며 최초 지도 제작자였던 그가 말한 아페이론은 “신적인 것으로서 만물을 포괄하고 횡단하며 보호하고 조종하지요.”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 개념을 통해 신의 무한성을 처음으로 규정한 철학자 입니다. 하지만 형태만 없을 뿐 어디까지나 ‘존재물’이며 다분히 자연학적 개념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형이상학으로 끌어올려 ‘존재’라고 이름 붙인 사람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였습니다. 그에게 ‘존재’는 비물질적 무한자이자 유일자였지요. (87)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을, 이후 자신의 존재론 체계 안에서 모든 이데아의 근거인 ‘일자’ 또는 ‘선자체’로 정립한 사람이 플라톤이었고요, 그 체계를 종교화한 사람이 플로티노스였습니다. 플로티노스도 ‘일자’를 신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말하는 일자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의 바탕에 깔린 심연이며 한정할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한정할 수 있는 것의 바탕이지요. 당연히 일자는 어떤 존재물이 아니고 그 일자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89)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인의 눈으로 사건의 전후 정황만 따져보면 신이 자기 이름을 계시한 것은 스스로 원해서라기보다는 마지못해 그런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를 이집트로 보내려는 신에 다소 불손한 의도를 감춘 채 사역을 빌미로 신의 이름을 물어 봅니다. 물론 모세는 신이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지요. 요컨대 그의 이 질문은 신에게 이름을 밝히든지 아니면 자기를 이집트로 보내는 명을 거두든지 간에 양자택일 하라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신이 선뜻 자기 이름을 밝힌 겁니다.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고 말이지요. 신의 대답은 그리스어로 된 최초의 구약성서 <<70인역>>에서 “나는 있는 자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때 존재와 존재물이 혼동될 수 있는 (존재가 곧 실체라는) 그리스 철학적 요소가 스며들어 히브리어 표현의 근본적 의미를 변질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자신이 있음을’나타내는 히브리어가 ‘있는 자’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지요.(93)
그리스 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는 개개의 사물들에게 그것을 그것이게하는 ‘본질’을 부여함으로써 실제 존재하게 하는 실체이다. 이후 그리스 철학에서는 존재라는 개념에는 항상 본질이 붙어 다니며 따라서 본질과 존재가 함께 있는 존재물과 혼동될 여지가 생겼다. 그러나 신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존재물과 같지만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와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단순히 존재라고 하지 않고 ‘존재자체’라고 구분해서 부르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 기독교 교리는 (dogma)다른 이교도들의 사상과 내부 이단의 주장으로부터 기독교를 구별하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발생부터가 방어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에 비해 기독교 사상(Thought)이란 기독교 교리보다 폭넓은 의미로서 기독교적 삶을 표현으로 받아들인 모든 사상과 다양한 주장을 의미하며 신학과 교리의 발생. 인정. 진행 과정이포함된다. (93)
신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다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는 신의 계시를 히브리 원어가 가진 의미에서 좀 더 가깝게 번역하자면 ‘나는 있는 자다’가 아닌 ‘나는 있음이다’여야 하고요. 설사 철학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나는 존재자다’가 아니라 ‘나는 존재다’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성서에 6832회나 쓰인 ‘야훼’에대한 가장 일반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해석은 ‘그는 있다’, ‘그는 존재한다’ 또는 ‘그는 현존한다’입니다. (95) 즉 야훼도 엄밀히 말해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은 아닌 것이지요. 모세에게 그의 ‘이름’을 계시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존재’와 ‘현현’을 계시한 것입니다. (96)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 라는 질송의 말처럼, 보이지 않고 사고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억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부단히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 이유이며 ‘신’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 까닭인 것입니다. 우리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존재보다는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존재물을, 다시 말해 신보다는 세상을 더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확일할 수 있지요. 기독교에서는 이 같은 우리의 성향을 죄성이라고 부릅니다.(98)
신이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나는 존재다”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존재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대답이 가진 진정한 의미예요. 신을 ‘존재’로 그리고 인간을 ‘존재물’로 파악한 것, 바로 이것이 모세가 이룬 신 개념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99)
모세는 서양철학에서 존재론의 기반을 닦은 그리스인 파르메니데스보다 적어도 700년이나 일찍 존재와 존재물을 확연히 구분한 인류 최초의 존재철학자였습니다. 그가 정립한 신(존재)에 관한 사유들이 키르케고르나 하이데거 같은 현대철학자들이 다룬 인간의 실존 문제까지 천착한다는 점을 평가한다면 실로 탁월한 존재철학자라고 해야겠지요. (100)
현대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하나님의 실존 문제는 물어질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만일 물어진다면, 그 성질상 실존을 초월한 것에 대한 물음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대답은 하나님의 성질을 몰래 부정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인 것처럼 긍정하는 것도 무신론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존재자체이다. 만일 하나님이 한 존재라면 하나님의 유한성 특히 공간과 실체의 범주에 속한다.”
신은 강하고 전능하고 영원하지만 어떤 하나의 존재물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물들 가운데 ‘가장 강한자’이고 ‘가장 능력 있는 자’.. 등등 ‘최고의 존재물’은 결코 아닙니다. 만물의 궁극적인 근거로 무규정자이고 무한정자이며 원칙적으로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대상은 신은 그가 모세에게 스스로 밝힌대로 단지 ‘존재’지요. (101)
존재와 존재물의 정의와 관계 이것은 신구약성서에서 자신을 계시한 신을 이해하는데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내용을 모두 포괄하는 주제입니다. 그리스적인(=철학적인) 존재 개념과 히브리적인(=종교적인) 존재 개념으로 나누어 살펴볼텐데 이제 토마스 아퀴나스와 마찬가지로 신을 존재로 동치해서 생각하고 읽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야기를 당신도 훨씬 풍성하게 이해할 것입니다. 존재와 신을 동치하는 것은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여 기독교 교리를 정립한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바로 이 같은 방법 즉 신을 존재로 그리고 존재를 신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동사나 형용사로 쓰인 경우와 특별한 경우는 제외) (103)
그리스인들과 존재
기원전 5세기쯤 그리스인들은 ‘세상 모든 존재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물음으로 철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궁극적 근거를 ‘아르케’라고 불렀지요. 탈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아르케라고 생각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수와 질서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내세웠어요. 이들중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의 궁극적인 요소가 ‘존재’라고 주장했지요.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형이상학적 사변의 근본적 두 주제인 ‘본질’과 ‘존재’ 중 하나인 존재를 간파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존재론(ontology)이라고 부르는 형이상학(metaphysic)으로 단번에 뛰어든 것입니다. 즉 만물의 근거를 탐구하던 아르케에 대한 물음이 자연철학에서 존재론으로 도약했지요. (104)
파르메니데스가 궁극적 요소로 존재를 주장할때 그가 이해한 존재의 속성은 ‘불변성’이었습니다. 즉 오직 존재가 있고 비존재는 없다라고 표현했지요. 오직 변하지 않는 것만 있는 것이고 변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사유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거쳐 후일 기독교로 들어가 “신은 불변한다”라는 선포를 낳았습니다.
정리해보면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변한다. 그러므로 존재물들에 대한 모든 인식은 거짓이다. 이처럼 ‘존재’ 와 ‘비존재’, ‘진리’와 ‘거짓’을 이분법적으로 날카롭게 구분한 일.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서양철학사에 남긴 공적입니다. 이 사상은 그대로 플라톤에게 이어져 그가 존재로 인식한 이데아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이고, 존재물들에 대한 인식은 진리가 아닌 ‘사견’일 뿐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오직 ‘참’과 ‘거짓’만을 인정하는 이치논리 또한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입니다.(107)
상식적으로 보면 사과나 책상처럼 결국 변화하면서 우리가 보고 만질수 있는 가시적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 아닌가요? ‘존재’니 ‘이데아’니 하는 것들처럼 변하지 않고 우리가 단지 정신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가지적 세계야 말로 실제로는 없는 것이 아닌가요? 완전히 뒤바뀌었지요. 여기서 우리는 현기증 나는 이 ‘뒤바뀜’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질송은 저서(존재란 무엇인가?)에서 플라톤에 의해 실재성이 부정된 현실의 실재를 논쟁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플라톤이 있다는 것(영원불변하게 있는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플라톤에게 ‘현존한다는것'(세상에서 가시적으로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 묻고 있는 것이다. “(108)
기독교인들에게 진실하고 참된 세상은 우리의 관점에서 현존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어떤 다른 세상이지요. 곧 플라톤에게 ‘이데아의 세계’였던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며, 그렇기에 참되다는 것이지요. 반면 우리가 사는 이곳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렇기에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유가 이후 서양문명의 기반이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109)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계승한 플라톤은 개개의 사물 안에는 이데아가 들어 있습니다. 이 ‘들어 있음’을 통해 개개의 사물들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은 물론, 있음이라는 ‘존재’를 부여받게 되지요. 뿐만아니라 자신의 ‘이름’까지 얻게 됩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사물들에 ‘완전히’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부분적으로만’ 들어 있지요. 그래서 개개의 사물은 이데아처럼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불변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데아론을 “분여”이론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결과 개개의 사물은 그 본질에서 불완전하고, 존재에서도 실재성이 적지요. 언젠가는 퇴색하고 같은 종류의 사물들 사이에도 이데아가 들어있는 양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질적 차이가 ‘단계적’으로 생깁니다. (112)
분여이론을 통해 사람들은 비로소 자연에 왜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질적 차이가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인간 세상에 왜 가치의 차이가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지요. 더욱 중요한 점은 분여이론에 따라서 존재와 존재물의 차이와 상호관계가 분명해졌다는 점입니다. 존재를 분여이론에 따라 부분적으로 나누어 받은 존재물들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아예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존재를 분여이론에 따라 나누어 가졌으니까요. 단지 ‘불완전하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인식이나 언급도 완전히 ‘거짓’은 아니고 단지 불완전한 지식, 곧 플라톤이 말하는 ‘사견(doxa)’이지요. (113)
자 지금까지 이야기할 존재를 서두에서처럼 신으로 동치하여 풀어보겠습니다. “신은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우주만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다. 그리고 우주만물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다. 따라서 신만이 진리의 근거이며,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일 뿐이다.” 기독교의 내용과 매우 흡사합니다.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플라톤의 분여이론을 접했을 때 그들은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이 곧장 이렇게 사유했습니다. 분여이론은 현실세계와 가치세계의 다양한 질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사다리’와 ‘존재의 사다리’라는 개념으로 발전해서 고대와 중세의 교회제도와 사회제도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14)
자연의 사다리에서 존재의 사다리로
플라톤 철학에서 어떤 사물이 더 많은 이데아를 분유해서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더 안 변한다는 것, 더 완전하다는 것, 더 단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 대한 지식도 더 많은 진리를 포함하게 됩니다. 이미지>사물>수학적대상>이데아의 순서로 올라갈수록 더 변함이 없고 완전하며 단일하지요. 각각에 대한 지식도 예술>자연과학>철학의 순서로 올라갈수록 더 진리에 가까워집니다. 플라톤은 각 선분의 길이가 이미지에서 이데아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짧아지도록 조정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올라갈수록 질적인 면은 점점 좋아지지만 양적으로는 점점 적어진다는 것을 표시했습니다. 이것은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후일 플로티노스가 체계화한 피라미드식 계층구조’를 암암리에 제시했다는 의미입니다. 플라톤이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으로 제공한 피라미드형 층계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의 사다리”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자연학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론>>에서 식물>동물>인간 이라는 ‘존재물의 계층구조’를 떠올리는 데 기여했어요. 또한 플로티노스가 물질>영혼>정신>일자 라는 ‘존재의 계층구조’를 구성할 때도 근간이 되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117)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의 사다리는 “아마도 인간보다 더 우월한 또 다른 종류”에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모호하게 언급하기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분명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존재물의 계층구조’였고 그 정상에 인간이 있지요. 이 같은 사유가 19세기 다윈에 의해 ‘진화의 사다리’라는 매우 의미 있는 개념으로 연결됩니다. 다윈은 ‘진화의 사다리’대신 “생명의 나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모양도 약간 다르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같아요.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느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신학자들에게는 이 사다리가 초월적 세계로까지 연장된 ‘존재의 계층구조’입니다. 그것은 물질세계로부터 비물질적 세계까지, 곧 지상세계에서 천상세계까지 이어진 “존재의 대연쇄’지요. 물론 그 정상에는 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서에 나오는’야곱의 사다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어요.(119)
신이 계층적 질서를 통해 자연의 사다리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 맞춰 우리의 지식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단계적으로 설정했으니까 그것을 따르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예시한 존재론적 계층구조라는 모호한 개념은 그의 영특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자연의 사다리’라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생물학적 위계질서와 결합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로 유입되어 가장 미소한 존재물로부터, 모든 가능한 단계를 거쳐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에 이르는, 무한한 수의 고리로 연결된 ‘존재의 대연쇄’라는 신학적 개념으로 굳어졌지요. 18세기 후반까지 철학자와 신학자,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교육받은 일반인들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 우주관이자 가치관이었습니다. (124)
존재의 계층구조에서 사회적 계층구조로
존재의 사다리의 각 단계를 곧 ‘야곱의 사다리’의 가로장처럼 여겻기 때문에 위단계로 올라갈수록 신에게 더 가까워지는 거지요. 따라서 교황과 국왕의 권위가 신성하고 절대적이라는 것이, 적어도 프랑스대혁명까지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진리였습니다. (127)
고대와 중세 그리고 적어도 17-18세기 들어 사회계약설(계약, 곧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맺어진 합의의 구속을 자연법으로 인정하는 것)이 나오기전까지 사양의 자연법사상안에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로부터 뻗어 나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지며 서양문명에 고착된 ‘존재의 대연쇄’라는 형이상학이 뿌리 깊게 들어 있었습니다.(129)
존재가 영원불변하는 실재이자 진리의 근거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거쳐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파르메니데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에서 존재는 (플라톤-이데아(idea), 플로티노스-정신(nous), 아우구스티누스-말씀(logos)) 불변성을 본성으로 갖고 있고, 우리가 따라야 할 모든 진리의 근거입니다. 이것이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 개념과 히브리적 개념이 상충하는 지점이에요. 히브리인들의 존재개념은 만물을 생성.소멸시키는 역동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진리 개념 역시 불변성을 근거로 하지 않고 오히려 생성.소멸하는 작용, 곧 변화시키는 본성을 근거로 하지요. 천지를 창조한 ‘신의 말’이 바로 그렇습니다. 신의 말은 만물을 생성.소멸시키고 의롭게 만드는 작용을 하므로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라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생각입니다.(131)
존재는 창조주다
꿈속에서도 플라톤의 공리를 해석하곤 했다는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는 존재와 존재물 간의 차이와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을 계승하고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다분히 종교적인 성격을 띠는 ‘일자 형이상학’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대강 이렇게 요약됩니다. “일자란 모든 존재물의 궁극적 근거이자 그 모두를 포괄하는 자이지요. 그 어떤 것에도 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은 무한자로서 모든 한정되고 규정된 것들의 궁극적 근거가 되지만, 그 자신은 어떤것에도 포괄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초월자입니다”(132)
일자의 개념은 당시에도 논란이었습니다. 영원불변하는 일자가 어떻게 다른 어떤 것을 생성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불변인 일자가 뭔가를 갑자기 생성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변화한다는 뜻이니까요. 이에 대해 플로티노스는 유출(deriva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답했습니다. “일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그리고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고 그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 그에 따르면 일자로부터 누스(nous) 곧 ‘정신’이 맨 먼저 유출 됩니다. 일자가 정신의 아버지인 셈이지요. 정신을 인식하는 외부의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스스로가 인식하는 자이면서 스스로 인식되는 자입니다. 자 여기서 이미 자기 안에서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로 분리되기 때문에 일자가 아닙니다. 정신은 자기직관을 통해서 플라톤이 ‘이데아’라고 부르는 것, 즉 세계 창조를 위한 참된 형상을 자기 안에 만듭니다. 즉 플로티노스에게는 정신이 곧 세상 만물을 창조하는데 모범이 되는 틀입니다. 그런데 정신이 자기직관에 의해 창조된 형상은 일자나 정신과는 달리 어떤 제한성이나 규정성이라는 ‘안정된 조건’에 따라 생성됩니다. 이것이 곧 우리에게 그것의 존재가 인식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정리해보면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에 의해서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것이며 이렇게 해야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134)
이 정신에서 영혼이 유출되는데 그 원리는 일자에서 정신이 유출될 때와 같습니다. 영혼이란 흔히 말하는 불멸의 실체라기보다는 정신 안에 있는 형상이 현실화되는 ‘현실화의 원리’이자 ‘운동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영혼에 의해 물질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구요.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에서는 정신이 ‘창조주’이기는 하지만 단지 어떤 ‘창조의 틀’로서만 작용하며 그것을 현실화하는 일은 영혼이 합니다. 영혼은 물질과 비물질세계 사이에 존재하며 연결고리로서 위로는 정신을 아래로는 자연계를 바라보며 만물을 창조합니다. 여기서 영혼은 어떤 행위를 통해서 물질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서’ 그 무엇을 생산해 내는 매우 특별한 방식을 취합니다. 즉 영혼은 나를 볼수 있게 비춰지는 거울처럼 정신안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이데아)들이 물질 안에서 가시적 형태로 스스로 만들어지도록 돕는 역활을 합니다. 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종의 촉매 작용입니다. (136)
아퀴나스가 말하는 성부,성자, 성령이 플로티노스에게는 각각 일자,정신,영혼인데요 단테의 신곡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자신의 빛(형상)을 마치 거울에 비추듯이 새로운 존재들에게 비추고 있소”라는 구절입니다. 이 거울에 비추듯이 라는 의미는 결국 영혼의 ‘성찰’, 곧 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영혼의 작용입니다. (138)
플로티노스의 이 형이상학적 사유들은 낯설기도 하지만 이러한 사유가 기독교에 들어가서 서양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입니다. 플라티노스의 세계구조에서 물질세계를 유칠시킨 일자.정신.영혼은 영원불변하는 ‘신적 존재’입니다. 창조와 관련해서본다는 일자는 창조의 바탕이고, 정신은 창조의 틀이며, 영혼은 창조의 원리지요. 그리고 그들로부터 유출된 물질은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됩니다. 신적존재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세가지 이론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의해 야훼를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그대로 쓰였다는 점이 주목해야 하지요. 초이성적 계시를 교리로 이론화해야 했던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플라톤주의 철학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의 존재 개념과 그리스의 존재 개념을 종합해 기독교적 신 개념을 형성한 결정적 계기지요. (143)
히브리인들과 존재
히브리인들에게 ‘존재’는 영원불변한 것인 동시에 생성.작용하는 실재입니다. 이 실재의 생성과 작용이라는 활동을 통해 모든 존재물은 그의 피조물로 창조되고, 또한 그의 백성으로서 행복과 구원으로 인도되지요. 그의 백성이 신에게 기원하고 순종해야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겁니다. (146)
그리스인들에게 존재란 영원불변한 것이었습니다. 즉 언제나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존재는 논리적으로 결코 변화할 수 없습니다. 다른 무언가를 변화하게 만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변화입니다. 이러면 존재의 자기동일성은 깨지고 말지요. 이데아나 플로티노스의 정신(nous)은 물질의 생성에 관여할 때도 자기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고 단지 창조의 틀로만 작용합니다. 불변을 속성으로 하는 존재와 변화를 속성으로 하는 생성 또는 작용은 이처럼 개념적어로 서로 대립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변화(생성.작용)하지 않고 변화(생성.작용)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파르메니데스로부터 내려온 존재론 전통의 한결같은 생각이지요.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haya라는 한 개념 안에 존재.생성.작용을 다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 불일치와 차이를 알아야만 히브리인들의 신 개념은 물론 기독교의 신 개념도 비로소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7)
빨강이라는 색은 끊임없이 자기동일적 빨강을 생성할 때에만 유지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퇴색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세상 만물은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자기동일적 생성과 작용을 통해서만 불변할 수 있습니다. 즉 존재는 생성.작용할때에만 존재일 수 있고, 불변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변화할 때에만 불변 할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보만은 이러한 종합이 우리에게 기이해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사유가 가시적 또는 사물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사유가 심리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종합이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는의미입니다. (149)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마술
존재와 생성의 종합이 가진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가시적 또는 사물 중심적 사유냐, 아니면 심리적 사유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에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두 탈시간화함으로써 그 변치 않는 본질을 통해 ‘개념적으로’ 파악했고 히브리인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 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파악했지요. 탈시간화란 장노출로 후미등을 찍은 사진을 보듯이 일정 시간 안이긴 하지만 변화하는 대상을 탈시간화해서 정지(불변)하는 대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개념을 산출하는 우리의 정신은 앵글의 노출시간을 ‘아주 길게’ 열어 놓은 카메라와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변화하는 대상으로 부터 불변하는 개념들을 얻어 내는 것이지요. 그리스인의 탈시간화란 변화하는 존재의 ‘시간밖에서의 모습(=탈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변화하는 존재란 불변하는 존재의 ‘시간안에서의 모습’ 또는 ‘시간화된 모습’일 뿐입니다. (152)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논리학은 이처럼 철저하게 탈시간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변화도 전혀 다룰 수가 없어요.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시작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화한 논리학의 전통이자 한계이며 이것을 통해 사유해온 서양문명이 탈시간화된 이유이고, 우리가 히브리적 사고를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이며,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시간화된 새로운 논리학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종교가 만나 형성된 기독교와 그것을 기반으로 형성된 서양문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재적소에서 그때마다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마술이 필요합니다. (153)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신은 영원히 안식하느냐 아니면 부단히 활동하느냐? 라는 물음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은 “신은 영원히 안식하면서 부단히 활동하신다”라는 말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모순되지만 이 대답은 사실 이런 뜻입니다. 즉 신은 ‘시간밖에서는 영원히 안식하지만, ‘시간 안에서는’부단히 활동한다는 것이지요.(154)
히브리인들은 존재라는 개념이 생성이나 작용이라는 개념과 대립된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관념도 갖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히브리인들은 단지 그들의 언어생활 속에서 하야를 존재하며 생성.작용하는 행위 로 인식했고 그들의 종교생활 속에서 야훼를 존재하고 창조하며 인도하는 신으로 체험했던 것이지요. 구약성서는 이러한 인식과 체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이러한 언어적 인식과 종교적 체험이 기독교인들에게로 이어져 기독교 신론인 삼위일체설의 ‘종교적’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삼위일체서의 이론적 토대는 ‘일자’와 ‘정신’과 ‘영’으로 구분한 플로티노스의 사변이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인역시 구약시대에 히브리인들이 그러했듯이 종교적 현실 속에서 하나인 신을 불변하는 존재인 성부와 창조 활동을 하는 성자, 그리고 성스럽게 작용하는 성령으로 실제로 체험했다고봐야 합니다. (157)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입니다. 사과를 사과로 존재하게 하는 사역이지요. 스스로 생성.작용하는 존재가 아니고야 어떻게 본질과 존재를 피조물들에게 줄 수 있을까요. 자신을 무한한 ‘존재의 장’으로 펼쳐 그 안에서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존재, 바로 그것이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라고 계시한 신이자 히브리인들이 하야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신이지요.(157)
기독교 신학이 ‘존재자체’라는 용어로 계승한 신이기도 합니다. 이 용어는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역동하는 존재입니다. 명사라기 보다는 동사에 가깝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유에도 이러한 역동적인 신의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고 있으며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
(158)
존재의 바다와 ‘퍼텐셜’
소립자의 장인 퍼텐셜도 통상적 의미의 물질은 아니에요. 그래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칸트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물자체’를 퍼텐셜과 견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든지 물질로 현실화될 가능성이나 경향성만을 가졌으므로, 어쨌든 유물론적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프네우마(히브리어로 루아흐의 그리스어-바람이나 숨결을 뜻함) 어떤 정신과 의지가 아니라 온 우주를 꽉 채우고 있는 미세한 원시물질입니다. 양자역학에서의 퍼텐셜은 단지 일반 물질들과 전혀 다른 성질을 가졌다는 의미에서만 비물릴적이지요. 이런점에서 퍼텐셜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프네우마와 같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의 루아흐, 신약성서에서의 프네우마가 신과 연관해서 사용할 때는 오직 ‘영’이라는 뜻만을 갖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은 물질에 부단하고도 압도적으로 작용하지만 철저히 비물질적이지요. 전혀 물질이 아니고 물질로 부터 어떤 작용도 받지 않으며, 스스로 움직이는 신적 원리이자 의지입니다.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의 오해 없는 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문용어들의 조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163)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은 만물을 무에서 창조했지만 무에서 직접 이끌어 낸 것은 아닙니다. 우선, 무에 가까운 어떤 원물질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만물을 창조했다는 거예요. 무와 무질의 중간에 있는 거의 무에 까가운 이 무형의 원물질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형상 없는 땅”이고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무시할 수 없는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퍼텐셜과 존재의 장을 굳이 구분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존재의 장은 퍼텐셜 안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퍼텐셜을 무조건 초월하고, 우주 안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우주를 무한히 초월합니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은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장’ 곧 신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도 세계의 일부가 되어 세계에 대한 신의 절대적 독립성, 곧 신의 세계초월성이 훼손되기 때문이지요.(164)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인 야훼를 가르키는 것은 퍼텐셜이 아닙니다.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나 초월합니다. 같은 말을 안셀무스는 신이 모든 것을 “관통하여 포괄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물위에 떠있는 어떤 사물을 물이 포용하듯이 밖에서 포괄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 위에 뜬 물방울들을 물이 포용하듯 안팎으로 침투해서 포괄한다는 뜻입니다. 요컨데 “최고 본질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해 있고, 모든 것은 최고 본질로부터, 그것을 통해, 그것 안에 있다”는 겁니다. (165)
신의 모습 상상하기
신에 대한 모든 상상, 모든 형상화, 모든 규정과 언급은 사실상 부질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십계명 가운데 두 번째 계명에서 신이 우리에게 우상과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금한 근원적인 이유고, 중세에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 가운데 하나인 성화상 파괴운동(동방정교회와 로마카톨릭의 최초의 분열을 가져옴)의 신학적 동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을 형상화하는 것에대한 강렬하고도 부단한 욕망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신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신을 인식하지 못하고야 어떻게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사랑과 은혜를 갈구 할 수 있겠습니까?(167)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존재의 바다라는 비유를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바다’라는 비유를 통해서, 우선 신이 암암리에 사람처럼 생겼으리라는 끈질긴 망상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바다가 우주마저 포괄하고 초월한 만큼 무한하다는 점에서 ‘신은 없는 곳이 없다’ 는 오랜 주장도 큰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요. 이와 동시에 신이 유일하다른 교리를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 선포가 아니라, 존재의 바다가 무한히 광대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포괄하며 그의 바깥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 바다가 퍼텐셜처럼 그 자신은 무형이지만 모든 유형적 존재물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형체가 없는 신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교설을 이애할 수도 있지요. 물방울이라는 비유에서 우리는 우주만물이 신에의해 상겨나서 그 안에 존재하다가 그 안에서 사라지는 피조물이라는 교설이나 늘 신은 우리의 모든것을 헤아린다는 교훈 역시 자연스레 수긍할 수 있게 됩니다. 존재의 바다라는 이 비유는 또한 성부.성자.성령이 ‘나뉨속에서도 연합해’ 있고,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구분되는 셋’이라는 신의 삼위일체 속성을 어려움 없이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게 합니다. (172)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흥미롭지만 생각보다 어마하게 복잡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가지 측면으로 접근해 봐야 하지요. 하나는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이지요. 전자는 기독교 교리가 확립된 이래 행해진 숱한 논증이 바로 이문제를 다루며 후자는 지식의 건전성을 살펴보자는 것으로 특이 이 건전성에 대한 질문은 근대 이후에 지식의 옳고 그럼을 판단하는 데 기준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그것을 경험적으로도 검증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라고 감동적으로 외치는 명제를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177)
실존은 어의만으로 보면 ‘실제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신학자가 이런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그러나 키르케고르 이후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써 의미 있게 산다’라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실존은 실존주의자들의 용법을 사용하며 실존의 기존 의미인 실재로 존재함을 표현 할때는 현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습니다. (179)
신의 현존을 증명하려는 논증은 11세기 말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와 마르몬티에의 수도사 가우닐로간에 있었던 논쟁이 가장 흥미롭습니다. 안셀무스는 경건한 수사이자 열정적인 수도원주의자였습니다. 성직서임권을 놓고 영국 왕과 맞선 투사였으며, 제자들을 사랑으로 교육한 훌륭한 스승이기도 했지요. 그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구호로 내세웠으며, 기독교 신학에 중요한 획을 긋는 저술을 많이 남긴 탁월한 신학자였습니다.
“신 정의상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다. > 가장 완전하다는 것은 그 어떤 결핍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 만일 어떤 것이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한다면, 이는 실제적 존재가 결핍된 것이다. >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도 존재한다.” 하지만 무명의 수도사가 안셀무스를 어떻게 비판한 것일까? 그가 내놓은 비판의 핵심은 우리의 정신에 존재하는 관념이 무엇이든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페가수스나 인어공주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반론에 대해 당대 최고의 신학자인 안셀무스는 신 개념은 일반 개념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는, 이른바 ‘신 개념의 특수성’을 내세워 반박하지요. 안셀무스는 “그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표현한 신 개념은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무엇 하나도 결핍될 수 없는 ‘절대적 완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즉 그러한 현존은 필연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신은 정의상 가장 완전한 존재다. > 현존에는 필연적 현존과 우연적 현존이 있다.> 필연적 현존이 우연적 현존보다 완전하다>그러므로 신은 필연적으로 현존한다. (183)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이 논쟁을 다시 지피게 됩니다. 그의 주장은 ‘가장 완전한 존재’는 존재의 완전성인 현존을 ‘필연적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이 삼각형의 본질과 분리할수 없는 것처럼 신의 현존이 본질로부터 분리될수 없다 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의미있는 반론은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그의 신의 현존에 대한 반박은 두 단계로 수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개념은 개념의 영역과 현존의 영역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가장 완전한 존재의 현존이 개념상 필연적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현존이란 사실의 문제이므로 경험으로 판단해야지, 사고로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칸트가 볼때 존재론적 증명에는 이처럼 개념의 필연성을 뜻하는 ‘논리적 술어’와 현실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실재적 술어’에 대한 혼동이 들어있습니다. 두번째 개념은 모순명제입니다. ‘삼각형은 세 각을 갖고 있다’라는 명제의 모순명제은 ‘삼각하는 세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자체적으로 모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삼각형이 실제로 세 각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경험적으로 검증 해보지 않고도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각형이라는 주어 개념에 ‘세각’이라는 술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과는 빨갛지 않다”는 명제는 자체로는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과’라는 주어 개념에 빨갛다’라는 술어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적으로 검증하지 않고는 “이 사과는 빨갛다”라는 명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지요. 칸트는 이러한 명제를 ‘종합판단’이라고 불렀습니다. (186)
신은 현존한다의 모순명제는 신은 현존하지 않는다. 라는 명제에 그 차제의 모순이 있나요? 아닙니다. 따라서 분석판단 명제가 아닌 종합판단 명제입니다. 당연히 논증의 타당성만으로는 그 명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고 경험을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인간이 순진한 이념들로부터 통찰을 더 늘리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상인이 그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자기의 현금 잔고에 동그라미를 몇 개 더 그려 넣어도 재산이 불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길’
그는 안셀무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더 명백한 길’을 개척했습니다. 이 다섯가지 방법은 다음의 일관된 형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세계에는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일반적인 특성이 있다. 세계의 모든 일반적인 특성은 스스로 생겨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에의해서만 생겨난다. 이 때문에 무한소급해 가는 모든 원인의 궁극적 원인이 없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특성을 가진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계에는 궁극적 원인이 존재한다.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들이 모두 감각적 경험에서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시작해서 초감각적 존재인 신의 현존을 이끌어 내는 논증 방법에는 ‘자연의 사다리’ 또는 ‘존재의 계층구조’라는 형이상학이 깔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상에서 시작해서 하늘까지 빈틈없이 연결된 존재의 대연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노스를 통해 형성된 이 형이상학적 시다리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중추이지요.(189)
순수한 개념과 사고에 의해서만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안셀무스와 달리 아퀴나스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로부터 신의 현존을 완벽하게 이끌어 냅니다. 여기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감각적 경험에서 논증을 시작한 것은 옳지만 오직 사고만으로 ‘우연적 존재’의 현존에서 ‘필연적 존재’로 이끌어 내는 추론 과정은 결정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무한소급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하지 존재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칸트가 제시한 원칙이지요. ‘필연적’이라는 용어는 ‘논리적 용어’일뿐 ‘존재론적 용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으로 증명되지 않는 대상에 이 용어를 적용시키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일이지요. 이를 칸트는 우주론적 증명에는 “변증법적 월권의 그물망이 감추어져 “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존재의 사다리’를 인간의 이성의 한계 부분에서 무참히 끊어 버렸지요. (192)
하지만 이후에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옹호하여 칸트에대해 재반론을 펼치는 카톨릭 신학자들과 ‘자연의 사다리’를 여전히 굳게 믿는 일반인들이 더 많았어요. 서양문명에서 카톨릭교회의 옹호 아래 적어도 1500년 이상 이어내려온 ‘존재의 계층구조’에 대한 믿음은 너무도 강한 것이어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193)
페일리의 시계를 망가뜨린 사람들
페일리의 시계 유추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반론은 페일리가 죽은 후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제기되었습니다. 그는 캠브리지 시절 대중적으로 인기 있던 페일리의 <<자연신학>>에서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흄, 칸트, 밀처럼 철학자들의 공공연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페일리의 논증이 그때까지 여진히 인기를 얻었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200)
왜냐하면 이논증은 고대 수사학에서 흔히 ‘예증법’이라고 부르는 유비추론의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이지요. 예증법은 수사학적 논증법 가운데 설득력이 가장 강해요. 그래서 동서고금의 성현들은 모두들 예증법을 즐겨 사용한 것이고, 사실상 그 분야의 천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사학은 어디까지나 대중을 위한 설득의 기술일 뿐입니다. 페일리의 논증이 일반인들이 아니라 지식인들 그리고 상당수의 성직자들에게까지 널리 퍼진 데는 보다 결정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페일리의 시계 유추’를 비판한 홈, 칸트, 밀 같은 철학자들은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을 뿐 페일리가 설명한 자연의 복잡성과 합목적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던 것이지요. (202)
다윈의 진화로은 자연의 복잡성과 합목적성을 페일리의 ‘신의 섭리에 의한 합목적적 창조’라는 추상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당시 서구 지식인들이 선호했던 귀납법을 사용해서 경험적. 실증적으로 설명해 주었지요. 복잡하고 정밀한 동물의 기관들은 진화가 동식물을 막론하고 생존경쟁을 하는 가운데서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종만 살아남는 방향으로 ‘충분히 오랫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16,17세기 두 차례의 과학혁명과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을 거치며 과학주의와 실증주의의 19세기 사람들은 페일리의 논증을 받아들여 마냥 의심스러운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윈은 자신이 직접 의도한 것이라고는 볼수 없지만 어쨌든 진화론은 기독교를 향해 ‘자연을 위한 신의 개입은 처음부터 아예 필요가 없었다’는 결정적 메세지를 던졌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의 창조주는 자연선택이라는 기계적 메커니즘이고 그것에는 아무런 예정된 목적도 없기 때문이지요. (203)
우리는 마치 페일리가 성직자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마치 기독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도킨스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 사실은 정반대지요. 18-19세기에 서구에서 유행하던 자연신학은 당시 신교과 구교를 막론해서 진실한 신앙을 가진 신학자들이 맞서 싸운 가장 위험한 이단적 이론이었습니다. 당시 정통적 신학자들이나 신실한 성직자들은 차라리 다윈의 진화론은 받아들일 수 있을지라도, 페일리식의 자연신학은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섬기는 이신교, 인류를 숭배하는 인류교 와 같이 기독교를 인간중심적이고 과학적인 종교로 개혁하려는 이단들의 온상이었기 때문이지요. (204)
특히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개혁신앙의 구호를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 및 진리의 근거를 초이성적 계시에서 구하지 않고,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에서 구하려는 자연신학을 강력하게 거부하지요. (205)
어느 기독교 종파나 교단이 원하기만 한다면(가톨릭은 1997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이미 받아들여졌지요) 진화론을 큰 무리없이 창조론의 일부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진화론을 근거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이나 창조론을 근거로 진화론과 싸우는 기독교 지식인들 모두에게 경고가 되는 것이지요. 페일리의 시계 유추 논증, 목적론적 증명, 물리신학적 증명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번째 길’은 19세기에 이미 철학적으로도, 논리학적으로도, 또한 종교적으로도 거부되었습니다. (207)
마야의 찢지 못하는 베일
중세를 대표하는 위대한 신학자인 두 사람은 모두 ‘필연적 현존’ ‘우연적 현존’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신의 현존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안셀무스는 ‘개념에서 줄발해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증을 전개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감각적 경험에서 시작해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증을 펼쳤습니다. 안셀무스는 플라톤. 플로티노스.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진 존재론의 영향 아래 있었던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은 적극 수용했기 때문에 이에요. 근대에서는 이 두사람의 방법론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각각 계승하게 되는데 이 차이는 본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적 차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209)
플라톤에게 진리는 우리가 정신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게 대한 지식’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에디도스에 대한 지식’입니다. 플라톤은 그 자신도 골방에서 천상의 이데아에 대해 골똘히 사색을 했지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때 자신의 제자였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원을 받아 만든 세계 최초의 동식물원이 있는 리케이온의 정원에서 산책하며, 지상의 에이도스를들 관찰했습니다. 한마디로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과학자” 였던 겁니다. 중세에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전해진 플라톤의 영향 아래 있던 에리우게나, 안셀무스, 보나텐투라 등을 비롯한 베네딕토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속한 학자들과 ,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새롭게 받아들인 로스켈리누스, 토마스 아퀴나스,둔스 스코투스등을 비롯한 도미니크 수도회 출식 학자들이 갈라섰지요. 이어서 근대에는 각각 그 전통을 이어받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첨혜하게 대립했습니다. (210)
데카르트,스피노자,라이프니츠 같은 합리론자들은(플라톤이 그랬던것 처럼) 인간의 정신에는 선천적 인식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요. 그래서 사고만으로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정신은 아무것도 씌지 않은 ‘빈 서판’과 같아서 그 안에 선천적 인식 능력이란 전혀 없고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이같이 경험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경험론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손들이지요. (211)
이제 안셀무스가 오직 사고만으로 신의 현존을 이끌어 냈는지,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텐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 대신 무명의 수도사 가우닐로간에를 옹호하고,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세계의 일반적 특성들(운동,능동인,사물)에서 출발해서 그것들의 궁극적 근거로서의 신의 현존을 증명했는지도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중세철학을 공격함으로써 근대철학의 문을 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가 왜 안셀무스와 같은 종류의 신 증명을 전개했는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2000년은 족히 이어지던 해묵은 논쟁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이가 18세기 독일에 혜성처럼 나타났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한 이마누엘 칸트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순수이상비판>> 에서 그는 신의 현존에 대한 논증은 그것이 어떤것이든 간에 일종의 오류라는 것이지요! 신은 우리의 감성으로 파악되지 않아서 그에 대한 모슨 인식은 단지 공허란 즉 “내용 없는 사고”들이 떠도는 영역을 “폭풍이 이는 광대무변한 바다” 또는 “가상의 본거지”라고 불렀습니다. ‘가상’의 사전적 의미는 “주관적으로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나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 현상”이지요. 영혼이나 신에 대한 사고가 가상입니다. 이런 대상도 사고될 수는 있고 또 사고되어야 하지만 인식될 수는 없지요. 왜냐하면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칸트가 신학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형이상학에 준 타격은 치명적이었어요. 월듀런트는 철학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이상학은 사상사를 통해 실재의 궁극적 본성을 찾아내려는 시도였으나, 이제 사람들은 가장 존경할 만한 권위에 입각해서는 실재는 결코 경험 할수 없다는 것, 실재는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 없는 가상체라는 것, 아무리 정밀한 인간지성이라도 결코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며, 마야의 베일을 찢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13)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상은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지만 감성이라는 섬 안에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한마디로 감성의 한계가 곧 이성의 한계지요. 감성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사고는 가상이고 오류의 원천입니다. 칸트는 이렇듯 결코 끝나지도 않고 끝낼 수도 억는 모험의 전형적 예가 형이상학이나 신학이 다루는 명제들이라고 했습니다.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이 그중 하나인데요. 이율배반이란 서로 모순이 되는 두 명제가 진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칸트는 논증만으로 신의 현존을 증명하려는 일체의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칸트의 네가지 이율배반중에서 마지막 네번째는 세계에는 필연적 존재가 있다. 하지만 이 명제는 진위를 가릴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부정명제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215)
무릇 이성만의 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
칸트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각각 받는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행했던)신의 존재증명이라는 유구하고 무익한 오류들로부터 신학을 지켜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었죠. 이로서 신학은 20세기에 칼 바르트가 갔던 길, 다시 말해 신의 현존에 대해 합리적 증명이나 이해보다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우선하는 길로 나아가는 이론적 발판을 앋었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른바 ‘진리의 땅’에서 신에 관한 명제와 논증을 ‘폭풍이 이는 바다’로 내쫓아 버림으로써 근대신학이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은 철학의 망령에서 벗어나 종교적 성격을 회복하기 시작했던 겁니다.(217)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말을 통해 칸트는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두었습니다. 그 이후 근대 학문에서는 중세에 비해 경험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강조되어 진리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었지요. 이 새로운 규범은 신의 존재와 법칙을 찾는 신학보다는 자연에서 그것들을 찾는 자연과학에서 더욱 강하게 요구되었어요. 과거의 자연과학과는 달리 현대과학이 찾는 대상의 존재와 법칙은 신의 그것에 못지않게 형이상학적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천체물리학과 양자물리학은 특히 그렇지요. (218)
따라서 현존은 일차적으로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지요. 그래서 이야기는 이제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신의 현존을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나
‘신에 대한 경험’ 또는 ‘종교적 경험’이란 가능한가에 대한 학자들의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입니다. 종교적 경험이란 본디 모든 종교의 근원이지요.
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주된 태도가 사유였다면, 히브리인들의 태도는 경험이었죠. 히브리인들에게 신의 현존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논증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행위를 경험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었어요. 이러한 전통은 당연히 기독교에 계승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신에 대한 모든 지식은 인간이 철학과 같은 “초등학문”을 통해서는 없을수 없고 오직 신과 인간 사이의 쌍방적 인격관계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강력했지요. (220)
신비롭거나 기적과도 같은 종교적 경험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된다는 데는 많은 학자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왔습니다. 근대와 함께 대두한 합리적 주장들의 영향으로 기독교 내에서조차 종교적 경험을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세력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자연시학자들, 프랑스와 독일의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한 이신론입니다. 초기 기독교를 근대과학의 합리성과 조화시켜 반기독교적인 신비주의와 세속주의에 저항하려는 목적으로 이신론을 주장하였으나 후기 이신론자들은 본래 목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진실한 종교는 초이성적인 것들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내의 모든 기적과 예언등 비이성적 요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223)
그런데 자신들의 신앙생활 안에서 부단히 크고 작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물론, 충분히 이성적 신학자들마저도 이 같은 반론이 ’종교적 경험에의 한 신의 존재증명’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홉스나 흄 또는 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224)
신구약성서는 온통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로 넘칩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그는 기독교 사상사를 통틀어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의 소유자였으니까요.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중세에 쓰인 그 어떤 저술보다도 선명하고 정교한 논리적 구조물로서 마치 해맑은 수정덩어리를 지상에서 하늘까지 쌓아 올린 거대한 성전과 같은 느낌이지요. 하지만 그또한 그의 주님 곧 존재자체에 관한 어떤 것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는 평생 열정을 쏟아 왔고 수많은 사람을 경탄케 했던 저술인 <<신학대전>>이 한갓 “지푸라기”처럼 값어치 없게 느껴졌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현상, 다시 말해 한 인간의 판단 기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은 것이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입니다. (225)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란 어떤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 같은 일상적 종교생활에서 종교적 깊이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성스러운 경험을 말합니다. 인간의 삶의 모든 것을 ‘신과 연관해서’ 살펴보고, 삶의 모든 관계와 책임의 영역에서 ‘신에게 대응하는’ 태도를 말하는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고의 틀이고 삶의 태도예요. 미국의 과학사학자 토머스 쿤이 정의한 ‘패러다임’이라고도 말 할 수 있고요. 패러다임이란 본디 그 자체가 ‘신념’과 ‘가치체계’이자 동시에 ‘문제 해결 방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패러다임과 이를 통해 얻은 경험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패러다임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경험은 서로 엉켜있어서 패러다임이 다르면 경험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인식은 일종의 해석인 것입니다. (228)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주만물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개개의 사건들 모두가 역사를 움직이는 신의 참여와 인도를 표상하는 증거들인 동시에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의심할 수 없는 논거들인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에는 “구름같이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며, 숱한 변형을 거친 다음에 그가 기독교 세계의 일원이 되어 기독교인이 보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이 반응하듯 반응하게 된 다음에야-한마디로 기독교인으로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한 다음에야 – 가능해지지요.(229)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인시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랬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들이 될 겁니다.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이미 ‘증명의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는 논리적 추론을 통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외치는 신학자들의 주장이나, 그 반대로 과학적 관찰을 근거로 우주에는 신이 없다고 외치는 과학자들의 선언이 모두 부질없고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신의 현존’은 오직 실존의 문제일 뿐 논증이나 관찰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실 그들이 그런 논증을 펼친 것은 그걸 통해서 신의 현존을 ‘확인’하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신의 현존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하는 신도들의 이성을 ‘설득’하려는 의도로 행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230)
메타노이나 – 신비적 형태에서 일상적 형태로
종교적 경험에서 우리가 간직해야 할 교훈은 그것의 ‘신비적 형태’가 ‘일상적 형태’로 이어질 수 있으며, 또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신비적 형태의 경험이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의미의 중심점이자 ‘삶의 전환점’이 되어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쿤의 용어로 말하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응하는 신학성서의 용어가 ‘메타노이아’입니다. 기독교 용어로는 이전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의미에서 ‘회개’나 ‘회심’이라고 번역하지요. ‘일상적 형태’로 이어지지 못한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는 여타 종류의 환상이나 환각과 구분할 길이 없으며, 나아가 그 자체가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는 무의미합니다. (233)
어떤 종류의 신비적 경험을 한 후 그것이 전환점이 되어 그 사람의 삶이 기독교적으로 변하면, 다시말해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면, 그는 분명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경험한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뜻대로 행하는자라야 들어가리라. “ 같은 말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했지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린도전서 13:1 ~ 2) (235)
3부
신은 창조주다
오늘날 “신약시대 이후 가장 뛰어난 기독교인이며 라틴어를 사용한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라는 평가를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방대하고도 심오한 저술들을 통해 기독교 신학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장에 자서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창조주로서의 신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남겨 놓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약의 태초 창조부분의 구절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이말을 마치 기하학에서 모든 정리들이 출발하는 공리처럼, 다른 모든 ‘진리들의 원천’으로 생각하고 우리도선 짐작조차 할 수 없이 난해한 그 계시들을 풀어내는 일에 과감히 조전했지요. 그 결과 자연과학에 익숙한 오늘날의 우리까지 <창세기>에 기록된 신의 창조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 그가 마치 암호와도 같은 텍스트들 안에서 신에 대한 매우 중요한 기독교 교리들을 이끌어 냈다는 점이지요. (241)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록>>안에 있나
위대한 생애, 불멸의 학문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재성과 경건함을 타고난 사람은 아니었어요. 뼈가 빠지게 일해 교육비를 대 안버지 덕에 농사꾼이 아닌 학자가 될 수 있었고, 눈물이 마를 날없이 기도한 어머니 덕에 젊은 날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수사학에 남다른 재주를 보인 그는 수사학 선생이 되었는데 나중에 그는 변론의 기술인 수사학으로 무엇이든 그럴듯한게 꾸밀 수는 있을지라도 진리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수사학을 떠납니다. 하지만 이미 축적된 그의 뛰어난 수사학 지식들은 훗날 그가 여러 디단과의 교리 논쟁에서 승리하는 데, 그리고 불멸의 저술들을 남기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키케로의 철학서에 감동한 그는 문장 탐구보다는 지혜 탐구라는 ‘새로운 계획과 꿈’을 갖게 되지요. 이 때 그의 관심이 감성적 문학에서 지성적 철학으로 돌아섰다는 점입니다. (237)
절충주의 철학자인 키케로가 전하는 지혜는 전통적 철학과 종교적 신앙을 적당히 섞은 것이어서 별로 독창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키케로의 철학이 바로 그랬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에게서 오히려 학문에 대한 실용적이고 절충적인 관점과 기술을 충분히 배울 수 있었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 다시 말해 아테네와 예루살렘을 성공적으로 절충하고 통합한 사람이었으니까요. (248)
자신의 내면에서 들끓던 탐욕과 정욕의 문제로 고심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도처럼 어둠의 왕국과 악의 세력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 내면과 세상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악에 대한 , 더 타당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후 9년이나 마니교에 머물렀지요.(250)
로마에 도착한 그는 이번에는 회의주의경향을 띤 ‘아카데미 학파’라는 철학 집단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그대의 회의주의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설계한 것처럼 인간이성으로 이상세계를 세워 보려던 영웅적인 그리스 정신이 이미 몰락했다는 의미를 띠었지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그렇듯이 당시 회의주의자들도 지식과 도덕의 보편성과 확실성을 부인하고 상대성과 개연성만을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회의주의가 ‘이성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 개인뿐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기독교적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준비 단계로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누구든 이성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야 어떻게 초이성적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250)
서른이 된 아우구스 티누스는 로마를 떠나 밀라노의 수사학 교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여기서 생의 획기적 전환을 맞이합니다.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마니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암브로시우는 당시 대부분의 뛰어난 기독교인이 그랬듯이 신플라톤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를 결합시키는 일에 불철주야 매진하고 있었어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순한 수사학의 강의자가 아닌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 녹아 있는 신플라톤주의적 가르침에 차츰 매료되었지요. 다른 설교자들과 달리 암브로시우스는 복임을 권위에 기대서가 아니라 이론적으로 풀어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플라톤주의 이론을 빌려 이성적으로 가르쳤지요. 그럼으로써 신도들이 복음을 신앙만으로가 아니라 이성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라고 믿는 것을 바랄 뿐마 안니라, 그것을 이해하려고 안달이 난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초이성적 계시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운 것이 고대 신플라톤주의가 초기 기독교에 공헌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중세 스콜라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는 직책으로 가톨릭교회에 봉사한 일이기도 했지요. 사실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바로 계시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운 일이지요. (252)
신플라톤주의는 오리게네스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에게도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 정립한 이성주의적 세계관을 전하는일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현대의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적 이성주의를 내세워 동방의 이원론인 마니교를 극복한 것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 덕분에 현대의 자연과학, 수학, 테크놀로지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254)
<<고백론>>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은 그의 오랜 망설임이나 갈등과는 달리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극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는 386년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개종 후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던 지혜가 기독교에 있음을 확신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과 이성을 결합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탁월함은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다른 신플라톤주의자들보다 훨씬 뒤늦게 이 저술들을 접했는데도 그 누구보다 빨리 놀라운 경지에 도달했다는 점이지요. 그가 알아낸 것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철학이 “단지 몇 마디만” 바꾸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플로티노스의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성서에서 모순이라고 생각되던 많은 것이 삽시간에 해결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을 위해 이성을, 신학을 위해 철학을 부단히 사용했습니다. (260)
학자들은 방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을 크게 세 단계로 분류합니다. 첫 번째 시기에는 마니교를 논박하며 주로 인식론과 신론을 정리했고, 두 번째 시기에는 도나투스 분파 문제에 골몰하여 교회론과 성례전을 정리했으며, 세 번째 시기에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싸우며 은총론과 예정론을 확립했다는 것이지요. 그의 저술의 탁월한 질에 대해서는 “화이트헤드 교수의 말처럼 서양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듯 서구의 기독교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각주라고 말할 수 있다”는 시카고 대학의 교수 대니얼 윌리엄스의 말이 대변하지요. ‘신학계의 플라톤’이라고도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들은 그 후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가톨릭 신학자들에게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아가 루터,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바울을 따라 구원은 신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은혜의 교리’를 재차 긍정하고 이어받았지요. 오늘날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등 서구 프로테스탄트의 주류가 그 뒤를 잇는다고 자처합니다. 비록 그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중 많은 부분은 거절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철학에서도 데카르트, 스피노가, 라이프니츠 같은 대략 합리론자들은 물론이고, 칸트, 볼프, 헤겔을 포함한 독일 관념론자들도 인간정신의 내부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여기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과 ‘상기의 힘’이 있어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할 수 있다는 것 등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덕을 보았습니다. 비록 공공연하게 인정하지는 않지만요. (262)
고백인가, 증언인가
<<고백론>>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 글이 단순한 회고록은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우선 이 글에 나타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는 먼저 자신이 진실로 불경건하고 이교도적이었음을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현재가 어떤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준비되었는가를 독자들에게 알립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인간의 삶이란 – 자신의 삶이 그랬듯-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 주기 위해서였지요. 이처럼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모든 삶과,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세계의 모든 역사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예정되고 인도된다는 교리는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이라 의미로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를 사용했지요. 우리말로는 ‘구속경륜’ 또는 ‘신적 경륜’으로 번역하는데요. 신이 그의 섭리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간다는 뜻입니다. 현대 신학학자인 파울 틸리히는 신적 경륜을 인간의 차원에서 파악하여 ‘신율’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외부 권위에 의해 인간의 자율을 전적으로 폐기하는 타율과는 다릅니다. 신율은 자율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키지요. 섭리에 의해 모든 상황과 여건이 성숭되어 초월적으로 실현되는 자율을 말합니다. 틸리히는 “자신의 신적 근거를 알고 있는 자율이 곧 신율”이라고 규정하지요. (265)
<<고백록>>은 비록 회고록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눈물로 쓴 기나긴 신앙 간증이자, 탁월한 신학자가 쓴 성서 해석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바로 이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삶의 정점에서 회고록을 쓴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매개로 자기가 맡은 교구의 교인들을 교육할 신앙 간증서 내지 신학 교육서를 썼던 겁니다. (266)
아우구스티누스는 히포의 감독이라는 막중한 직위를 맡고 죄 많았던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하려 한 게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이라는 기독교적 진리를 ‘증언’하려고 <<고백록>>을, 아니 <<증언>>을 저술했다는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이 증명하듯이,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우주의 역사 또한 어떤 우연이나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에 의해 창조되고 보존되며 인도된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했던 것이지요(268)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위대한 후계자이자 경쟁자이기도 한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지적 탁월성과 영적 경건함을 타고난 사람이 결코 아니었어요. 마치 우리들이 그렇듯이 그의 영혼도 본디 칠흑처럼 깜깜했고, 그 안에서는 세속적 욕망이 용광로처럼 들끓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269)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술품 같은 자연으로부터 예술가적 창조주를 발견하고 감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신학자들이나,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에밀 브룬너처럼 ‘자연에 나타난 신의 계시’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와는 다른 또 하나의 구원 방법으로 여긴 것 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종교개혁자 칼빈처럼 자연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무대”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장소”로서 이해했음을 분명하지요.(271)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태초는 언제인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물리적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 할 수 없지요. 그런데 창조 이전에는 사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요컨대 “피조물이 생겨나지 않는 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창조는 시간 속에서 행해질 수 없고 ‘태초에’ 창조와 함께 시공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지요. <<고백록>>11장에 제시한 그의 대답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천지를 짓기 전에 신은 안식하셨다는 겁니다. 창조와 함께 시간이 시작되었으므로 창조 이전에 신은 시간 밖에 있었지요. 그런데 시간 밖에는 어떤 변화나 행동도 없습니다. 이 같은 논리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천지를 짓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라고 담대하게 답했지요. (276)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창조와 함께 시간이 생겼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신기하게도 현대천체물리학이 내세우는 우주론인 ‘빅뱅이론’과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창조론과 빅뱅이론 사이에 존재하는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에 먼저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종교와 과학이 설사 같은 용어로 같은 내용을 말할지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역시 적잖은 놀라움 속에서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일찍이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을 만났을 때도 그랬듯이, 기독교와신학은 언제나 당대를 지배적으로 주도하는 문명과 대립하는 동시에 융합하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우리는 대립하는 두 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물론, 한발 더 나아가 히브리적 요소와 그리스적 요소, 유신론적 성격과 유물론적 성격, 종교적 믿음과 이성적 사고가 여전히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서양문명의 이중적 성격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늘 것이기 때문입니다. (278)
이 우주를 출범시키는 데 필요한 정밀도는 우주의 순간순간 행동을 지배하는 동역학 방정식들이 이미 우리에게 보여 준 놀라운 정밀도에 비하여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빅뱅은 어째서 그렇게 정밀하게 계획된 것일까? 그 이유는 아직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러한 특이점이 분명 존재했지요. 그런데 이 작은 점은 너무나 압축된 나머지 ‘어 특이하고도 영광스러운 순간에 급기야 대폭발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팽창이 텅비어 있던 어두운 공간을 뭔가가 순식간에 채워나간 것은 아닙니다. 아직 공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특이점이 ‘언제’ 존재했느냐고도 물어볼 수 없습니다. 아직 시간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무에 가까운 특이점 밖에는 공간도 시간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주는 그야말로 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284)
무에서 유가 어떻게 나오는가?
양자요동이 일어나는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이나 ‘최초의 물질이 형성되는 양자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적 무’가 아니라는 점이지요. 그래서 그것들은 또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그건 아직 모른다”라고만 대답하고, 신학자들은 “당신들이 모르는 그 원인이 바로 신이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모든 이론이 그렇듯이, 과학 이론도 더는 연역될 수 없는 가정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궁극적인 물음의 해답은 언제나 경험과학의 영역 너머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이런저런 논란은 차치하고 단순히 ‘논리적’으로만 생각해보면, 우주가 탄생할 때 어떤 식으로든 무에서 유가 생겨나는 일이 ‘적어도 한번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지금 존재하는 이 주주의 ‘존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우주가 어떤 특이한 한순간에 탄생했고 지금도 무서훈 속도로 계소 팽챙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두고 넘어가도록 하지요.(289)
무수한 우주가 존재한다고?
다시 말해 모든 일이 어찌 그리 순식간에 , 어찌 그리 적절히 조절될 수 있었을까요? 그값들에 아주 미세한 변화만 있었어도 우주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테고, 우리와 같은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었다니, 도대체 이러한 숫자들과 물리법칙들은 모두 어디서 왔을까? 왜 하필이면 이 숫자, 이 법칙들일까요? 바로 이것이 우주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며, 그의 계획에 의해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생각을 과학자는 인본 원리라고 부르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지적 설계론’이라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논증 형식으로 표현해서 신의 존재증명 가운데 ‘목적론적 증명’이라고 부르지요. (292)
우주가 살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핵물리학의 법칙에 매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핵물리학의 법칙에 매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핵물리학의 법칙에는 우주만물이 ‘공모’한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의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요컨대 실재하는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구조 사이에 ‘공모’ 또는 ‘협동’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가 이 같은 우주적 사실들이 곧바로 신의 창조를 증명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프리먼 다이슨은 “정신이 우주의 기능에 본질적 역할을 한다는 가설이 우주의 구조와 모순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지요. (298)
앨런 구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
기독교 신학에서 신이 세계 이전, 곧 시간과 공간의 ‘밖에서’ 창조했다는 말은 일단 신이 시간이나 공간 그 어느 것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절대적 독립성을 가진 ‘세계초월적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말을 할때에는 그 의미가 더 깊은 지점까지 확장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신의 ‘세계초월성’을 신의 ‘전지전능함’과 연결지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독교인들은 신이 세계의 어떤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그가 세계의 모든 것을 오직 자기 의지대로 생성.소멸.인도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이지요. 살 수만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려 사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그를 다시 살리는 것이나 죽은 후에도 다시 살게 하는 것이 신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믿음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300)
성서 텍스트의 ‘사실’은 예컨대 자연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존재세계의 사실입니다. 즉 창조, 신의 통치, 언약 중생, 심판, 종말, 새 세상등 성서의 언어로 구성된 ‘성서세계’에서 그 의미가 결정되고 객관성이 보장되는 사실들이라는 이야기예요. 이 세계의 언어에 대한 해명은 당연히 자연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인 해명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한 각성은 오늘날 종종 논의되는 ‘과학적 주장’과 ‘종교적 주장’간의 대립과 갈등을 해결하는 데 하나의 규범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지요.(302)
비트켄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언어에 의미를 발생시키는 규칙이라는 의미에서 삶의 양식을 ‘문법’ 또는 ‘논리적 문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물이 어떤 종류의 대상인가는 문법이 말한다”라고 주장했지요. 비트켄슈타인의 언어놀이에서는 한 명제의 ‘옳음’과 ‘그름’도 당연히 ‘삶의 양식의 일치 여부’로 가려집니다. 같은 삶의 양식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언어놀이를 바꾸는 것은 ‘하나의 사고 차원에서 다른 사고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자 ‘하나의 삶의 형식에서 다른 삶의 형식으로 옮겨 가는 일’이 되는 겁니다. 삶의 양식, 곧 문법은 한 세계에 대한 단순한 정보만이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삶의 통찰을 제공하지요. 이러한 ‘통찰’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형성해줍니다. 그 결과 “이미 사용 가능한 개념들이 변화하거나 더욱 확장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정보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진보 곧 이해의 폭을 넓히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이해의 진보’를 선물합니다. (304)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과학과 종교 사이에 바람직한 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지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 경이로운 통찰과 이해의 진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305)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양자택일이 있을 뿐인데, 어느 것이 사실가 더 맞아떨어지는가를 비교할 수 있는 어떤 중립적 관찰 방법이나 검증 기준은 없습니다. 미 말은 학자들은 ‘공통된 기준이 없다’라는 뜻을 가진 ‘공약불가능성’이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306)
쿤 자신도 그동안 ‘공약불가능성’을 상징하던 자신의 용어 ‘개종’을 ‘번역’이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에서 저것으로’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패러다임 전환이 반드시 개종처럼 어려운 게 아니라 번역처럼 용이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쿤의 패러다임이 상대적으로 ‘닫힌 체계’라면 비트켄슈타인의 언어놀이는 ‘열린 체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 사람이 여러 차원 또는 여러 종류의 언어놀이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언어놀이에 속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언어놀이의 문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앞서 제시한예들을 보았듯이) 이해의 진보를 가져와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오히려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307)
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과 상호이해
내가 언어놀이 이론을 자자하는 이유는 우선 과학과 종교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시키고 불가공약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강화하자는 것이지요. 만일 당신이 상대의 주장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 같은 새로운 합의나 일치를 얻어 냈다면 당신은 비로소 ‘이해의 진보’를 이룬 것이고 그로써 상대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지요. 프랑스 포스트모던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주장은 “사회적 유대는 상이한 규칙에 복종하는 적어도 두 종류(실제로는 무수히 많은) 언어게임들이 교차하는 조직망이다.”라면서 ‘다원적 이성’ 또는 ‘불일치의 이성’을 내세웠습니다. 이 다원적 이성을 위해서는 획일적으고 폭력적인 합의와는 무관한 정의의 개념 및 실천을 위한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언어게임의 이질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는 각각의 게임 그리고 여기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을 규정하는 규칙에 대한 합의가 존재한다면 이 합의는 국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310)
내 생각에는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일치나 합의에는 (설사 그것이 옳은 자가 그른 자에게 베푸는 선의라는 겉옷을 입고 나타날 때 조차) 사실상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하는 부당한 대우와 폭력이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311)
따라서 위의 리오타르의 주장처럼 종교와 과학의 바람직한 소통을 위해서는 두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상대가 사용하는 전문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과학과 종교는 같은 용어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다른 하나는 대화와 소통이 ‘상호주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고대의 철학이, 중세의 신학이, 근대의 물리학이, 오늘날의 생물학이 그러하듯이 진리 또는 보편성 실현이라는 미명 아래 (흔히 말하는 통섭)서로 다른 문법을 가진 담론들을 하나의 문법으로 획일화하려는 야망을 갖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312)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여, 단지 하나로 통합하거나 융합하는 게 아니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진리에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지식이 제 스스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313)
아우구스티누스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구절가운데 ‘태초’라는 말은 과학에서 접근하는 빅뱅이 아니라 신의 세계초월성을 해석해 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세계로부터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적 독립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초월성과, 세계에 부단히 참여하며 자신의 뜻대로 인도해 가는 인격적 속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내재성을 동시에 지닌 유신론적 신입니다.
** 범신론 – 신과 세계를 하나로 본다. 세계내재성만 가짐. 플로티노스, 스피노자, 헤겔, 하르트만이 주장했으며, 힌두교의 상카라도 이에 속한다.
** 만유재신론 – 신은 세계를 초월하지 않고 포괄하지만 범신론처럼 신과 세계가 하나는 아니다. 육체 안에 영혼이 있듯이 신이 세계 안에 있는 것. 우주는 신의 몸이며 신은 우주의 영혼이다. 따라서 신과 세계는 상호의존적이다. 현대의 화이트헤드와 제자인 하트숀이 주장했다.
** 유신론은 일신교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월래는 신이 인격적 속성을 가졌다는 것을 믿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그중 하나이다.
영원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태초’는 ‘시간 안’이 아니라 ‘시간 밖’을 뜻합니다. 그런 만큼 이 말은 신이 ‘시간의 밖에서’ 우주를 창조했고, 창조와 동시에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야 하지요. (317)
공간과 시간이 자체가 가변적이라면, 우리가 표상할 수 없는 다른 질서, 공간과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지요. 학문에서는 항상 개념 또는 용어가 문제 해결의 관건입니다. 새로운 개념과 용어가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318)
‘시간 밖의 시간’이라는 말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규정한, 시간이 가진 성질이 아닌 어떤 다른 성질을 가진 시간을 의미합니다. 영원이란 어떤 성질을 가진 시간일까요?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가차 없는 대답을 내어놓았습니다. 영원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간밖의 시간’이자 모든 시간의 근원인 ‘신의 시간’이 가진 성질이지요. 즉 기독교의 영원이란 시간의 무한한 확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은 영원하다’라는 의미는 단지 신은 신간 밖의 존재, 곧 세계초월적 존재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320)
현대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우리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그대로 되뇌었어요. 바르트에게 창조는 “과거,현재, 미래,어제,오늘,내일은 연속적이 아니라 동시적인” 신의 시간 곧 영원 안에 있는 신의 의지가 과거,현재, 미래로 흐르는 인간의 시간 안에서 전개되는 것입니다. 미래란 장차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어떤 시간적 과정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점차 자라나듯이 영원한 신의 의지가 인간의 시간인 역사로 순차적으로 침입해 들어옴 일 뿐이지요. 그것은 예정적이고 결정적이며, 만물을 급직적이고 가차 없이 새롭게 합니다. (321)
플라톤 철학에서 영원한 존재란 자기동일성을 유지함으로써 자기 전체성 안에서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현존하는 존재 곧 ‘불변하는 실재’를 뜻합니다. 시간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영원에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언제나 자기동일적 현재만 있기에, 영원은 불변하는 실재이며 신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322)
플로티노스에게는 영원이야 말로 가장 안정된 존재, 즉 미래에 변모될 것도 없고, 과거에 변화된 것도 없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은 신인일자에 속하지요. 플로티노스는 “그런 것이기에 영원은 장엄하고 이를 통해 신을 이해하게끔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원은 일종의 신이다’라고 말하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다”라고 영원을 찬양했습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에 의하면 시간은 ‘영원한 모상’입니다. 모상이란 ‘본떠서 만든 모형’이라는 뜻인데요. 개개의 사물이 이데아의 모상이라는 것과 같은 논리지요. 불변하는 이데아가 변하는 개별 사물 안에 부분적으로 들어(분여)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변하는 영원은, 변하는 시간 안에 부분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데아와 영원은 모두 원형이고 개개의 사물들과 시간들은 각각의 모상이지요. 원형과 이를 본뜬 모상의 관계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입니다. 이데아의 분여를 통해 ‘비록 한정된 것으로나마’존재하며 인식도 되고 이름도 갖게 되듯이, 영원의 분여에 의해 시간이 ‘비록 한정된 것으로나마’지속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인식되며, 이름(시간을 표시하는 수)도 갖게 된다는 겁니다. 플라톤은 당연히 시간을 “영원의 모상” 또는 “영원의 변화하는 모상”이라고 규정했어요. 플로티노스 역시 시간을 영원의 모상, 즉 분여물로 파악했습니다. 피타고라스학파처럼 시간을 천구의 운동과 관련하여 주장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트처럼 운동이거나 운동의 척도라고 파악하는 일체의 자연주의적 주장을 피상적인 것이라 판단하고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326)
플로티노스가 행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은 시간은 결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공간이 연장을 재는 척도이듯 시간이랑 지속을 재는 척도이며 그러한 시간을 파악하는 주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시간은 ‘마음 밖에서’파악할수 없고 오직 ‘마음 안에서’드러나며, 마음과 하나라는 겁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플로티노스는 시간이란 “마음의 삶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플라톤-플로티노스-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에서 말하는 시간을 ‘심리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어요.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고 보통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즉 시간은 영혼이 인식하고 측정하는 겁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당연히 신의 영원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수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327)
시간의 끝에 영원이 있다
플로티노스에 영원은 신의 마음이 사는 삶이고 신간은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부단히 신을 닮으려 하고, 시간 역시 꾸준한 집념으로 영원을 닮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의 마음이 신에게 이르면 그때는 시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에는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는 것이지요. 이런의미에서 시간은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해지는 가능성이자 과정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하기에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시간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 가는 문이자 통로지요.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찾아낸 시간의 아름다운 얼굴입니다!(330)
일자, 곧 신에게로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함! 바로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발견한 영원한 삶을 얻는 구원의 방법이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종교적 언어로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한 의도이며, 우리 삶에 주어진 시간의 궁극적 의미이고 가치이지요!
플라티노스가 “일자에게로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함”이라는 말로 간단히 예시한, 다분히 추상적인 구원의 방법을 150년쯤 지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개발했다는 사실이지요. 요약하자면 ‘시간’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신의 마음처럼 ‘영원’을 살도록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로 끝없이 분산되어 흘러가면서 그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분산시켜 단지 흘러가고 말게 하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하자는 것이지요. 플라톤-플로티노스-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시간론 전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구원 방법은 기독교 신학에는 물론이거니와, 철학과 문학을 비롯해 서양문명에 끼친 영향이 매우 넓고 큽니다. (332)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운동의 척도’로 파악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시계로 재고 있는 시간이 그것이지요. 이 물리적인 시간에도 ‘이전’ ‘지금’ ‘이후’라는 구분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지요. 그나마도 그 ‘지금’에는 시간적 인장, 곧 지속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분산되는 수많은 찰나들, 즉 지금.지금.지금이 무한히 계속될 뿐이지요. (333)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시간인 영원과 같은 시간, 즉 흘러가 버리거나 사라지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모드 현재 안에 존재하는 시간을 우리의 마음 안에서 찾아냈어요.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마음을 분산시키고 그 결과 삶마저도 단지 흘러 가고 마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물리적 시간의 끔찍한 파괴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애써 교훈하고 위로했지요. 우리 마음 안에는 이미 지가간 과거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여 마치 ‘바로 눈앞에 보이듯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가진 이런 능력을 ‘상기의 힘’이라고 불렀지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 능력을 통해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무한한 분산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체 안에서는 과거도 사라져서 허무한 것이 아니며, 현재 역시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미래 또한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 아니지요.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는 매 순간이 그 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책임을 부여합니다. 이렇듯 상기의 힘은 개인적 차원에서든 역사적 차원에서든 모든 허무주의를 극복하게 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에 깔린 심오한 사유입니다.(334)
플라톤은 분여이론을 통해 파르메니데스 이후 한갓 허상이자 거짓의 근원으로만 여겨지던 사물과 세계에 ‘비록 부분적으로나마’실재와 진리가 들어 있음을 설파하고 구원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분여이론의 변형이라 할수 있는 자신의 시간론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단지 흘러가고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인식되던 인간의 삶과 세계 역사에 ‘비록 한정적으로나마’ 의미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것들을 구원했지요. 인간의 삶과 역사는 헛된 것이 아니라고! 구원과 영원으로 나가는 통로라고!(335)
우리 육체는 그것이 존재물인 한, 세상의 모든 존재물이 그렇듯 좋든 싫든 물리적 시간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지요.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다릅니다. 물리적 시간을 살 수도 있고 심리적 시간을 살 수도 있어요. 존재물의 시간과 세속적 시간을 살 수도 있고, 존재의 시간과 신적 시간을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현재.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우리 마음이 심리적 시간, 존재의 시간, 신적인 시간을 살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이것이 플로티노스의 ‘일자게게로의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하라’는 교훈의 의미이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은 우리를 ‘신에게 향하도록’ 창조했다고 선언한 이유이자 내막입니다. 플라톤을 계승한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철학, 신학, 윤리학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존재의 전 차원에서,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존재의 전 국면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통일된 전체로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오진 신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플로티노스의 철학적 교훈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고백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또는 역사철학적 문제들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337)
예나 지금이나 일주일의 고통의 대가로 한순간의 환락을 사는 사람들은 신을 향해 그리고 영원을 향해 살라는,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훈을 의심합니다. 특히 신이 죽은 시대를 사는 오늘날 우리들은 신이니 영원이니 하는 이야기에 이미 진절머리 날 정도로 식상했는지도 모릅니다. 영원을 팔아 순간을 사지 않는다면, 삶이 과연 의미와 가치로 충만해질까? 우리의 마음이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직관하며 미래를 기대하고 산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 삶은 정녕 구원받을 수 있을까?(339)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와 프루스트의 ‘회상’
인간에게 어느 순간 갑자이 일어나는 ‘무의지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 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처럼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가지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또한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듭니다. “새로운 여러 가지 상을 지나간 것과 연관시키고, 이렇게 해서 미래의 행위나 사건, 희망을 구성하게 한다는 것이지요.(342)
인간은 역사의 객관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관이요, 주체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하고, 과거를 기억 속에 축척할 뿐 아니라 미래를 기대 속에서 기획하지요. 그럼으로써 현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식은 사실 과거와 미래를 현전하게 하는 상기의 힘에 의해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지요. (344)
직선의 흐름을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을 3차원적으로 들여다 봅니다. 시간밖에서 직선의 눈앞에 두고 보면 하나의 점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직선의 옆에서 바라보면 시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가는 것으로 보이고 신에게는 시작과 종말이 고정된 영원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매순간 인식되지만, 신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단번에 파악되지요. (346)
우리가 플로티노스나 아우구스티노스의 교훈을 따라 물리적 시간으로 자신의 삶과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에서 심리적 시간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신의 관점으로 바꾸는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 곧 회심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주인공 마르셀이 ‘무의지적 기억’을 통해 이룬 게 바로 이것이지요.
천지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나오는 “천지”라는 말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하늘과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공조차 열리지 않은 태초에, 신이 창조한 그 천지를 각각 ‘지혜의 하늘’과 ‘형상없는 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라는 구절을 보세요 여기서 말하는 하늘도 당연히 허블망원경으로 관찰되는 우주공간 속의 어느 한곳이 아니지요. 이 또한 ‘하늘들의 하늘’ 이나 ‘지혜의 하늘’로 인식하는 것이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신학에 무지한 일반 신도라면 모를까. 지난 2000년 동안 중요한 기독교 신학자들 가운데서는 그 누구도 우주공간 어느 한 곳에 신이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352)
현대 천체물리학자들은 대폭발 자체가 직접적으로 물질을 만들었다고 생작하지 않습니다. 대폭발은 엄청난 고열의 에너지 덩어리를 만들어 냈고, 그것이 우주의 확장과 더불어 급속히 냉각되면서 물질의 기본단위인 소립자들이 생겨났지요.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쿼크와 반쿼크가 생겼고 쿼크들이 결합해서 전자,양성장,중성자가 생겨난 겁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물릴적인 ‘무엇’이 아닙니다. 존재하기는 하되, 그 본질이 확정된 무엇 이 아닌 거의 무에 가까운 무형적인 것으로 단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지요. 하이젠베르크는 단지 소립자들은 입자 또는 파동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경향성만을 의미한다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이것들을 ‘잠재된 가능성의 상태” 잠태세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려 ‘포텐티아’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독일의 양자물리학자 한스 페터 뒤르는 “입자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장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한데 그런 장이 서로 응집하여 우리가 입자라고 부르는 것이 생깁니다. 원자를 관찰해보면 물질이 아니라 일종의 비물질적인 퍼텐셜이라 할 장이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세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 여기서 뒤르가 말하는 ‘장’, 곧 ‘비물질적인 퍼텐셜’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언급한 불사기적이고 무형적인 ‘형상 없는 땅’이라 할수 있습니다.
로버트 존 러셀은 1988년에 발표한 논문 <철학적.신학적 시각에서의 양자역학>에서 신이 세계를 지속적으로 창조하기 위해 양자물리학 차원에서 활동한다는 것과 신의 특정한 양자 사건 안에서의 행위가 우리가 보통 기적이라고 부르는 특별 섭리 사건을 산출해 내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매우 특별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러셀의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대한 양자역학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러셀과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이러한 초자연적 신의 개입을 ‘우연’이로 간주하고, 생물학자들은 이런 것을 ‘돌변변이’라고 부르지만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형상 없는 땅’이 바로 모든 양자 사건이 일어나는 퍼텐셜이라면 러셀의 이같은 주장은 전통신학과 현대과학을 잇는 매력적인 가교가 될 수 있을 겁니다.”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연과학 지식과 대립하지 않는다”라는 점이지요. (357)
아우구스티누스의 ‘천지’에 대한 해석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 안에 창조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교리가 담겼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에게는 관건입니다. 즉 우리는 그가 주장한 ‘무로부터의 창조’에 관심이 있지요.(357)
무로부터의 창조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는 마치 조각가가 진흙으로 아름다운 여인의 동상을 만들 때처럼 이미 주어진 혼돈상태의 진료에 형상을 부여해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플라톤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고 주어진 재료에 행한 일종의 ‘형상화’작업으로 봅니다. 이 경우 질료가 먼저 존재하는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에 데미우르고스는 야훼와는 달리 만물의 궁극적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절대적 독립성도 가질 수 없지요. ‘무로부터의 창조’는 기독교가 받아들인 히브리적 사고로, 신이 ‘창조주’이자 곧 ‘절대자’라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선포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부단히 나타나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에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요, 바로 ‘신의 절대적 독립성’과 ‘전지전능성’입니다. 이 두가지로 인해 신은 창조에서도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았다는 것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의 핵심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말을 무라는 어떤 실재가 있어서 신이 그것으로부터 창조를 이루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성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이 만들지 않은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라는 말로 못을 박았습니다. (361)
기독교는 처음부터 ‘무로부터의 창조를 신의 ‘절대적 독립성’ 내지 ‘전지전능성’과 연결하여 이해했던 겁니다. 기독교인들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자연과학적 원리로 이해하지도 주장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사실상 그런 일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오직 그들의 삶에서 체험하는, 막막한 절망과 간절한 소망에 귀를 귀울여 주고 그 손을 뻗어 해결해 주는 신의 무한한 능력과 연결 지어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해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무로부터의 창조가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하며 맞서는 일은 부질없고 의미도 없는 일이지요. 기독교인들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64)
보시기에 좋았더라
무로부터의 창조에서 파생된 중요한 기독교 교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물질과 그것으로 구성된 세계가 모두선하다는 것이지요. 세계가 선하고 아름답다는 이 주장은 철학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신플라톤주의자들과 갈라서서 오히려 플라톤에게로 다가가는 심오한 사유이며, 교리적으로는 마니교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사용했던 뛰어난 변증이기도 합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과 마니교도들은 인간의 육체를포함한 모든 물질세계를 악하고 추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지요. 플라티노스는 플라톤과는 달리 일자는 선하고 아름답지만 그로부터 유출된 존재들의 계층구조에서 맨 밑에 해당하는 물질들은 그 어떤 선한 잔류물도 갖고 있지 않아서 악하고 추하다고 보았지요. (366)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바울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세계는 선자체에 의해 선하고 아름다운 성과물로 창조되었다’라는 플라톤의 사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논리는, 신은 그가 창조하지 않은 질료, 즉 마니교에서 말하는 악하고 추한 질료로부터 물질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피조물은 선한 신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따라서 물질도 선하고 아름다우며 물질로 구성된 인간의 육체와 세계 역시 선하고 아름답다. 한마디로 창조는 그 근거와 결과가 모두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 아구구스티누스의 주장이었지요. (367)
마니교의 신이나 마니교에도 영향을 준 고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신인 차라투스트라가 그렇듯이 고대의 신들은 악하고 추하며 두려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와 함께,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신적인 성스러움과 그에 의해 창조된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규정되면서 서양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인간과 세계가 선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그것이 신의 선함이나 아름다움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신은 온전하게 선하고 아름답지만 인간과 세계는 불온전하게 선하고 아름다우며, 바로 그 때문에 언제나 타락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요. 바로 이 타락은 바로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과 세계가 모두 불온전해졌다는 뜻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은 “창조계 질서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죄를 지음으로써 “우주 전체가 약화되고 실추되는” 결과를 빚었다는 것입니다. ‘불온전하게 됨’, 이것이 타락의 기독교적(또는 존재론적) 의미고 ‘다시 온전하게 만듦’, 이것이 구원의 기독교적(또는 존재론적) 함의지요. (370)
온전한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과 세계가 어떻게 불완전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신의 선한 본성 내지 전지전능함과는 어긋나지 않는가요?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과 세계가 불온전하게 될 가능성, 곧 타락할 가능성을 가진 이유는 그것들이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느나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에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를 인간과 세계의 선의 근거로 해석한 동시에 타락의 가능성으로도 파악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것을 신과 그 피조물을 철저히 분리하는 데도 사용했지요. 그럼에도 신이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무로부터 창조된 인간과 세계 역시 (불온전하지만) 선하고 아름다우며, 그 어떤 악마적 세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는 예나 지금이나 귀하고 복됩니다. ‘신과 세계의 선함’은 언제나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던져주지요.(372)
창조의 여섯 날이 글자 그대로 ‘6일’인가
창조 시기의 날짜 수는 단지 창조의 순서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날짜 수’ 로서 자연적 의미의 날짜 수와는 다르다는 의미지요. 오늘날 일부 근본주의자들을 제외하고 혹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서양문명은 일찍부터 창조를 태초의 어떤 신비로운 시간에 의해 예섯 단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플라톤은 우주에는 창조와 함께 우리의 시간과는 다른 ‘거대한 세월’이 흐르는데 이 시간 끝에는 모든 천체가 각종 운행을 완수하고 다시 창조 당시의 위치로 복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일찍부터 <창세기>에 언급된 여섯 날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그 6일이라고 생각지 않았고 다른 어떤 시간의 단위로 생각했다는 것이 핵심이지요.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밝힌 대로 창조가 오직 신의 의지에 따라 어떤 신비롭고 거룩한 ‘순서’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여섯날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6일과는 ‘결코’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377)
말에서 육신으로, 진리에서 행위로
구약성서는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처럼 신이 ‘말’로 우주를 창조했다고 밝힙니다. 그 ‘말’이 신약성서에서는 ‘말씀’이 되고 동시에 그것은 성자라는 좀 더 구체적인 주역으로 등장하지요.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선포했는데, 그가 곧 예수지요. 기독교가 발 딛고 있는 초석인 ‘성육신’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요컨대 예수가 곧 말씀이고, 그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이지요. (379)
신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왔다는 성육신의 계시는 매우 신비롭고 특이합니다. 그래선지 네 명의 복음서 기자 가운데 오직 사도 요한 만이 성육신을 강조하지요. 오직 사도 요한만이 예수의 출생을 그의 신성으로부터, 곧 천지창조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창조사역을 맡아 이룬 ‘말씀’으로 언급하며 시작하지요. 당연히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 장면이 없습니다. 예수는 인간으로 세상에 온 신이어서 태초부터 이미 신성하기 때문이지요. 기독교인조차 간과할 정도로 사소한 일 같지만, 이건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380)
신학적으로 보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이후부터 예수에게서 신성이 나타났다고 언급한 공관 복음의 기록들은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신학적으로 탁월한 사도 요한의 교훈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계시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이성적 이해를 아예 불허하기 때문이지요. 초기 기독교 교리 구축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도 성육신을 뜻하는 라틴어 ‘인카르나티오’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성육신은 유대교뿐만 아니라 그리스 철학에서도 매우 낯선, 기독교 고유의 사유이기 때문입니다. (383)
기독교는 성육신과 함께 시작했고 성육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또 다른 종교인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완연히 갈라서지요. 그만큼 성육신은 기독교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구약성서에서 ‘말’이던 것이 신약성서에서 ‘말씀’으로 변화하는 과정과 그결과인데 매우 흥미롭습니다. (384)
구약성서에서 신의 ‘말’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다바르가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어 로고스 즉 ‘말씀’으로 번역되지요. 창조를 이루는 신의 ‘말씀’에 그리스어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겁니다. 그리스어 로고스는 일상적으로 ‘수집하다’, ‘계산하다’,’사유하다’등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로 ‘이성적으로 밝힌다’는 의미지요. 그런데 다바르의 어원적 의미는 ‘뒤에 있는 것을 앞으로 내몰다’,’대화하다’입니다. 주로 사물의 근원을 드러내고 말의 배경이나 숨은 의미를 알게 한다는 뜻이지요. 그리스적 언어와 사유가 정지적인 반면 히브리적 언어와 사유는 역동적입니다. 여기서도 로고스가 정적. 지적. 이성적 성격을 가졌다면 다바르는 동적.인격적.행위적 성격을 갖지요. (385)
무엇보다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는 다바르는 ‘비물질적’ 성격을 지닌 데 반해,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로고스는 ‘물질적’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다바르를 로고스로 표기한 요한의 작업을 통해 로고스의 의미가 다바르의 의미까지 포괄하여 더 확장된 것이지요. 즉 다바르에 내포된 동적. 인격적. 행위적 성격 그리고 비물질적 세계초월성이 로고스에 담긴 정적.지적.이성적 성격 그리고 물질적 세계내재성과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386)
불변하는 진리인 로고스와 역동적인 다바르의 종합을 통해 신약성서에 기록된 ‘말씀’이 단순히 진리뿐 아니라 행위와도 연관된다는 사실 역시 더욱 두드러졌다는 겁니다. 예수는 단지 신의 말을 전하는 교사나 선지자가 아니고, 그 자신이 곧 ‘말씀’ 입니다. 이 ‘말씀’은 발화와 동시에 언제나 그것이 뜻하는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는 수행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말로 천지를 창조한 신도 말만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행동이 함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된 성육신에 담긴 또 하나의 심오한 의미입니다. 요컨대 진리를 아는 자나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가 빛으로 나아간다” 는 것이지요. (388)
로고스와 다바르의 이러한 종합은 정지적인 그리스의 존재 개념과 역동적인 히브리의 존재 개념이 종합을 이루어 영원불변하는 동시에 생성.작용하는 기독교적 신 개념이 형성된 것과 궤를 같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불변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생성.작용하는 신의 본질’과, ‘불변하는진리’인 동시에 ‘창조하는 신의 말씀’이 가진 아름다운 통일성을 찾아볼 수 있지요. (388)
보만은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에서 “요한복음 기자가 로고스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 자신에게나 구약성서에 친숙한 독자들에게도, 다바르와 로고스의 극히 다양하고 깊은 의미들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통일성을 이루어 마치 동시에 퍼져 나가는 많은 교회 종소리처럼 울렸을 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종교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종합이 기독교 신학과 서양문명 안에 지금도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지요.(389)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풍부한 부자가 무엇이 필요하여?
구약시대부터 창조는 일회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시간에 따라 계속되는 ‘신의 역사’의 시작이자 일부로 이해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사도 바울에 의해, 창초가 태초에 이루어진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보존하고 인도하는 신의 사역으로 재차 강조되었지요.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를 비롯한 고대와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들도 바울의 가르침을 되풀이했지요. “보존은 창조로부터 구분되는 행위가 아니라 계속되는 창조다. 라는 중세적 표현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창조가 태초가 일어닌 일회적 역사가 아니고 섭리에 의한 지속적인 보존과 인도라는 의미입니다. <웨스트민스턴 신앙고백>에 섭리의 주체가 삼위일체 신으로 규정되지 않고 이렇게 창조주로 명시된 것도 바로 그래서지요.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그의 무오류와 예지와 그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계획에 따라 모든 피조물, 행동과 사물들, 곧 가장 큰 것를로부터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따라 지탱하시고 처리하시며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창조에 대한 언급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신의 사역에 대한 신앙고백의 성격을 늘 갖지요.(395)
신은 무슨목적으로 만물을 창조해서 보존하고 인도해 가느냐의 문제가 기독교 신학 안에서 이야기되었지요. 크게 둘로 분류해볼수 있어요. 16세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시인 피에르 드 롱사르는 “신이 어떤 결핍도 없이 오직 자족과 풍요만 있었는데도 세계를 창조했다고 읊고 있지요. 이에 반해 17세기 후기 플라톤주의자인 존 노리스는 “그렇다면 신은 무엇때문에 자신의 자족을 향유하지 않고 굳이 창조를 했느냐고 꼬집고 있습니다. (397)
신의 작업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를 이데아 중의 이데아인 ‘선자체’로 규정한 플라톤은 이후 선을 ‘자족적 완정성’으로 파악했습니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충족적인 사람은 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봉사나 사랑의 필요 또는 사회생활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특히 신의 경우에 명백하다. 한마디로 신은 자기 스스로 충족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의미에서도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결핍한 탓에 교제와 벗을 원하지만, 신에게는 어떤 결필도 없기 때문에 누구와의 사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은 도대체 왜 자족 상태를 향유하지 않고 물질세계를 창조했는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399)
일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충족적’이기에 풍요성을 갖게 되었고, 그 풍요성이 급기야는 자기 바깥으로 넘쳐흘러 자연스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철학적 사변이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을 통해 기독교로 흘러들어오면서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원시 기독교적 관념이 유출 논법으로 설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풍요라는 자신의 본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말이지요. 바로 이런 생각이 서양문명에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러한 고전적 사고체계에서는 신과 세계사이에 어떤 상호관계도 당연히 없습니다. 모든 것은 신에게서 세계로 일방적으로 흐르지요. 세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만 신은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401)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루터 신학과 프로테스탄트 일반에서는 창조가 ‘피조물과의 친교’를 위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칼빈 신학과 개혁파 교회 전통에서는 창조의 목적을 ‘신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둘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뚜렷한 공통점은 ‘어쨌든’ 신에게도 창조가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칼빈은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피조물이 없어도 된다. 그런데도 신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스스로의 영광은 고려하시지 않았으리라고 추론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논쟁에 불과하다. 인간을 창조하는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속에서 영광되게 하려는 것이다.(402)
창조가 신의 어떤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철학자들, 토마스 아퀴나스같은 중세신학자들만이 아니라 주요 현대신학자들도 반대합니다. 파울틸리히는 칼빈과 루터의 주장을 모두 ‘이교도적’이라며 부정했지요.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히 그 자신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주시는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에게 영광이나 사랑을 바칠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03)
눈먼시계공에서 도킨스가 언급한 두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을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다윈이 발견한 ‘자연선택’이라는 기계적 메커니즘이라는 것이고, 다른하나는 자연의 선택이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과정에 따라 진행될 뿐이므로 그것에는 아무런 목적도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도킨스는 여기서 무신론을 바로 이끌어 내는데, 한마디로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이끌어 가는 신은 (니체의 말처럼 죽은것이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지요.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 종교와 그리스 철학이 만나 서양문명을 이루기 시작한 후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와 과학 또는 신앙과 이성이 부단히 맞서 왔습니다. 서양문명은 전혀 이질적인 두 문명이 ‘마치 한 집안에 든 두 도둑처럼’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마치 신전을 지탱하는 두 기둥처럼’ 한지붕을 떠받친다고도 볼 수 있지요. 아마 그것이 서양문명의 장점이고 저력일 것입니다.(406)
다윈의 진화론과 그 영향
파르메니데스 이후 약 2500년 동안 세계를 ‘불변하는 존재의 체계’로 간주하던 서양의 사유가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생성하고 발전하는 체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사유의 대전향 가운데 하나로 진화론이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진화라는 개념은 다윈 당시에도 전혀 새로운 것은 나이었지요. 생물과 자연, 심지어 우주가 진화하고 있다는 이른바 ‘발전가설’은 늦어도 18세기 초부터 서양문명 안에서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다윈 이전에도 진화에 대한 여러 가설이 이미 떠돌았는데 단지 실험이나 관찰에 의해 귀납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요컨대 진화론의 전성기를 위한 역사적 무대가 이미 만들어져 찰스 다윈의 눈부신 성공을 서서히 예비했던 겁니다. (411)
다양한 증거자료를 먼저 제시한 다음 ‘모든 자료가 보여 주는 불가피한 결론으로서 모든 생물은 진화한다’는 식의 ‘귀납법’을 활용했지요. 그것은 베이컨의 귀납적 사고를 선호하던 영국 빅토리아 왕조 지식인들의 구미에 맞추려는 그의 의도였습니다. 그는 <<종의 기원>> 머리말에 자신의 연구가 귀납적 방법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상세히 기록해 놓는 것도 잊지 않았지요. 하지만 실제로 다윈은 <<종의 기원>>을 쓰기 전부터 진화론에 대한 착상을 먼저 갖고 있었고, 그것을 증명하기에 합당한 관찰들을 오랜 세월 끈기를 갖고 수행한 연역주의자였지요.(413)
다윈은 자연과학 이론인 자신의 진화론을 떠받치는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두 가지 용어를 각각 맬서스와 스펜서의 사회학적 개념들로부터 빌려 온 셈이지요. 그런데 이 사소한 학문적 행위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진화론과 연결되어 엄청난 사회적 불행을 초래하는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다윈 자신은 이 용어들을 “커다랗고 비유적인 의미에서” 쓰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자연이 그러하다면 인간사회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사회진화론이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중심으로 서구 각국에 들불 번지듯 퍼져 나갔기 때문이지요. (417)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
허버트 스펜서가 대표하는 사회진화론의 핵심적 교의가 스펜서의 ‘적자생존’ 개념이어서 ‘사회스펜서주의’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이 이론과 함께 자유.평등.박애라는 구호 아래 지상천국을 꿈꾸던 프랑스대혁명(1789) 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인간사회 역시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 지배하는 원시적 공간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력이 달라지면 관념이 변하고, 관념이 변하면 세계가 달라지는 법이지요. 생존과 번식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연세계의 법칙들이 학문, 예술,종교와 같은 정신적 가치도 함께 추구하는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척 불편합니다. 명예혁명을 성공시킨 역사적 경험과 흄을 배출한 학문적 전통을 가진 19세기 중반 영국 사람들이었지만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매혹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선 이미 진화론이 열병처럼 번지고 있었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자연을 따르라’는 해묵은 구호가 여전히 변치 않는 불문율로 통하고 있었거든요. 자연안에서는 신적 진리가 존재하므로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서양에서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연법’이라는 이름으로 스토아 철학을 거쳐 기독교에 들어와 ‘영원법’이라는 이름으로 중세 1000년 동안 서구사회를 지배했지요. 하지만 영미 자연신학자들의 이러한 믿음은 사회다윈주의자들이 톡톡히 혜택을 받습니다. (420)
이러한 완전무결성의 자연의 질서는 그대로 “자연은 신의 빛을 드러내” 보이며 “그것은 분명하고 변함이 없느며 보편적인 빛”이어서 자연의 법칙인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는 과오가 있을 수 없으며, 같은 이유 로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와 믿음이 당시 서구사회에 만연했던 것이지요. 19세기 서양 사람들의 믿음은, 자연적인 것은 사회적이기도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421)
사회다윈주의의 득세와 함께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에서는 ‘평등’ 개념이 이상사회 이념에서 매몰차게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의 메커니즘을 사회진보와 역사발전의 원리로 삼는 사회다윈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평등이란 실현될 수도 없고 또한 실현되어서도 안되는 ‘불순한’ 개념이었지요. 이들에게 사회란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진화를 실현해야 하는 계몽의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말로 접으들면 대내적으로는 인종.계급.남녀 차별주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였습니다. 이것들을 실행하기 위한 일목요연한 전략이 바로 ‘부적자의 제거’였지요. (423)
19세기 후반은 유럽뿐만 아니라 북미 대륙에서도 사회다윈주의가 그 위세를 맹렬히 떨치던 시기였습니다. 서양 문명 전반에 걸쳐 개인주의자들은 무자비한 방임을, 자유주의자들은 무제한경쟁을 요구했고, 우생학자들은 동족 내의 신체적.정신적.경제적 약자들의 합법적 제거를 부르짖었으며, 인종주의자들은 자국내의 열등한 인종이나 외국인 추방을 외쳤고, 제국주의자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을 미개지로 몰아 계몽 또는 선교라는 미명 아래 정복을 감했했습니다. (424)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한 조건과 환경을 시정해 갈 수 있으며 또 부단히 그래야만 하는데, 어떤 것이 일단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나면 그것을 시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지요. 20세기 후반 사회생물학에 바통을 넘겨주기까지는 사회다윈주의가 바로 그런부당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425)
그렇다면 사회다윈주의자들은 모두 악당, 무식쟁이 혹은 사회파괴자였던 걸까요? 오히려 그 반대였지요. 그들은 당시를 대표하는 과학자거나 지식인이었고, 무엇보다 계몽주의자였어요. 당연히 그들은 이상사회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상주의자들이었지요. 그들은 단지 – 중세 십자군원정 때 성직자들이 그랬듯이- 자신들의 정당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당한 수단을 제 스스로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의 본질이 무사유라고 설파했지요. 무사유는 일반적으로 ‘사려 깊지 못함’을 뜻하지만 그녀는 이 단어를 보다 실천적인 의미로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반성의 불능 또는 거부’를 지칭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아렌트가 경악했던 나치의 유대한 학살은 그 역사적 귀결이었지요.(429)
다윈과 기독교
<<종의 기원>>에서도 인간의 생물학적 위치에 대해서는 침묵했지요. 그러나 12년 후인 1871년 출간한 <<인간의 유래>>에서는 인간이 하등동물로부터 진화했음을 역설하고 멀지 않은 장애에는 문명화된 우세 인종이 야만적인 열등 인종을 대치할 것이라면서, 그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숨겨 온 신념을 드러냈습니다. 인간 자신을 진화 과정에 과감하게 밀어 넣음으로써 신의 창조물에서 원숭이의 후손으로 만들었지요.
하지만 더높은 운명을 향하여 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다윈은 곳곳에서 진화가 인간을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존재론적으로도 더 나은 존재로 상승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지요. 만일 이러한 추정이 옳다면 다윈은 ‘진화의 사다리’를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한 ‘자연의 사다리’로 국한하지 않고, 플로티노스가 설정한 ‘존재의 사다리’에까지 연결시켜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형이상학적 작업은 바로 다윈의 아들 이라고 불리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시행합니다. 니체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진화한 그 새로운 인간이 바로 ‘초인’이지요. 이일을 수행하면서 니체는 인간에 대해 다윈보다 훨씬 낮은 평가를 함으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도덕적 진화의 필수불가결성을 극대화했습니다. (432)
신의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오랜 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기독교인이 신이 자기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그건 결코 특정한 자연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신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종교적 메세지를 전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윈이 <<인간의 유래>>에서 밝힌 새로운 진리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 구원이라는 특별한 목적에 따라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구원이나 부활에는 그 어떤 보장도 없다는 겁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었고 인간이 원숭이에서 유래했다는 것도 차츰 상식이 되었지만,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어요.(434)
당시 영국의 계급사회는 영적으로도 지적으로도 한심한 상황에 빠져 있었지요. 상류층은 야만적이었고, 중산층은 속물이었으며, 서민들은 누가 뭐라 하든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화론의 사회적. 종교적 함의를 당시 기독교인들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근원적 이유였지요. (436)
다윈 자신은 물론이고 헉슬리 같은 당시 다윈주의자들이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과 연결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현명하게도 불가지론을 내세웠습니다. 헉슬리는 입증 될 수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해 마치 뭔가를 아는 것처럼 주제넘게 왈가왈부하는 유신론자들, 무신론자들, 관념론자들을 싸잡아 조롱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 입장을 취했습니다. 불가지론의 다윈의 입장은 이른바 양립주의 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다윈이 성가신 물음을 적당히 회피하기 위해 별 생각 없이 한 대답인지로 모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다윈이 취한 바로 그 입장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지요. 진화론의 싸움닭이라 불리던 헉슬리도 말년에는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와 결별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 강당에서 그는 인간은 진화와 윤리를 구분해야 하고 생존경쟁, 적자생존 같은 진화의 법칙들을 내세워 도덕률에 어긋나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설교했지요. (438)
우리의 소박한 예상을 깨고 19세기 말 서양의 성직자와 신학자들은 각각 나름의 성서적 또는 신학적 근거를 들이대며 지역과 교파를 초월하여 대부분 진화론은 적극 수용했습니다. 단서는 그들은 진화론과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냥 묶어서 ‘진화론’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세속적 이익에 대한 계산이 충분히 깔려 있었습니다. 그 속내는 바로 해외 선교에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진화론자이거나 사회진화론자이던 제국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제3세계 선교에 나서려는 것이었지요. ‘정치적 팽창주의’에 편승에 제3세계에 기독교를 포교하려는 ‘종교적 팽창주의’도 기독교 안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지요. 이 달콤한 마약에 눈이 먼 성직자와 신학자 들이 진화론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성찰 없이 서둘러 그것을 받아들였던 겁니다. (442)
창조론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나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 문제를 곧바로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것은 우선 잘못 된 일입니다. 다윈 자신이 창조론과 진화론의 양립 가능성을 열어 놓은 데다 예나 지금이나 상당수의 과학자와 신학자 역시 진화론을 인정하는 게 바로 무신론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니까요. 조지타운 대학의 과학종교연구소 존 호트는 성서의 깊은 의미는 도외시한 채 문자대로 이해하려는 ‘성서문자주의’와 마찬가지로 과학을 실험과 관찰에 의해 입증된 대로만 이해하려는 태도역시 본질적으로 자연의 깊이로부터 도망치는 문자주의”라고 지적했습니다. 사실상 오늘날 사려 깊은 유신론자는 진화가 다윈주의 이전의 세계관이 제공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여긴다. 라고 역설했습니다.
구약성서가 모티브가 된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창세기 표현과 신약성서를 더 충실히 반영한 밀턴의 <<실낙원>>에서 보듯 창조에 대한 견해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창조의 주체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차이와 같습니다. 여러번 언급했듯이 초기 기독교 신학은 주로 기독교로 개종한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해 정립되었습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성부에 해당하는 ‘일자’는 전혀 변화하지 않아요. 창조에도 당연히 관여하지 않습니다. 일자에서 유출된 정신과 영혼을 통해서 사물을 생성하고 사물에 작용합니다. 이제 성자에 해당하는 정신은 신의 영원한 형상(이데아)를 자기 안에 생성합니다. 이 형상이 자연물의 형태가 되기 때문에 플로티노스는 그것을 ‘종자적 형상’ ‘자연의 씨앗’이라고 불렀지요. 그리고 성령에 해당하는영혼은 그것들이 현실화되는 ‘원리’이자 ‘운동능력’으로 작용해서 모든 물질세계를 순차적으로 창조해 냅니다. 다시 한만디로 정리하면 신은 세계를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세계영혼(성령)에게 ‘세계를 현실화하는 질서와 과정’을 부여해 그에 의해 창조가 차례로 일어나게 했다는 말이지요. (449)
창조가 신이 ‘직접’그리고 ‘일시에’ 실행 한 사건이 아니라, 신이 창조해서 위임한 어떤 원리나 법칙을 통해 점차 이뤄졌다는 이론은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더욱 분명하고 확고한 이론으로 정립되었습니다. (451)
만약 신이 작접 창조했다면 모든 것이 필연적이겠지만 신은 제 2원인에 위임해서 창조하기도 했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효력을 지속시키더라도 많은 것이 우연적이다.라는 겁니다. 이 때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제 2원인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언급한 자연법이지요. “그러므로 사물에 대한 실제적 주권자인 신 안에 존재하는 통치 개념이 자연법이다. 신의 정신은 시간 안에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의 개념을 지니며, 그의 법칙은 영원법이라 불러야 한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신의 섭리를 일반섭리, 특별섭리, 성령의 내적 작용 세 가지로 분류했지요. 그가 말하는 일반섭리가 우리가 말하는 자연법칙입니다. 칼빈은 신이 모든 행위의 가장 우선적이고 직접적인 목적을 여전히 남겨둔 채, 자신이 창조할 때 부과한 이 일반섭리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면서 역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454)
요컨대 창조는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고,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신이 그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어떤 원리(현실화원리, 자연법, 제2원인,영원한법칙)에 위임해서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의 ‘진화 원리’ 또한, 신이 만들어 지속적 창조를 위임한 ‘현실화 원리’ 내지 ‘자연법’ 또는 ‘영원한 법칙’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454)
물론 신학자의 사변적 주장이 근대 이후 발달할 자연과학의 결과인 다윈의 진화론과 아무런 충돌없이 꼭 맞아 떨어진다는 건 아닙니다. 앞서 보았듯이,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요행히도 같은 관념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엄청난 시차 때문에 그 표현과 내용에서는 어쨌든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요. 해석의 문제로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하려면 고대로부터 내려오면 신학자들의 이론을 재해석해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남아 있는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만일 기독교 어느 종파나 교파가 원하기만 한다면, 기독교 신학은 큰 틀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일 이론적 바탕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이지요.(455)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은 문제
구약성서에 기록된 태초의 엿새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6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시간안’의 존재인 우리의 관점에서는 장구한 세월이 ‘시간 밖’의 존재인 신의 관점에서는 일시적인 것임을 해명할 수 있는 성서적.신학적 이론들을 기독교 신학은 이미 오래전 (늦어도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부터 갖추고 있었습니다. 구약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창조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계속되는 신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도 확보되어 있지요. 칼빈은 신을 창조 이후 가만히 쉬고 계신 분이 아닌, 세상을 자신의 섭리대로 이끌기 위해 “키를 잡은 배의 선장 같은 분”으로 교훈한 것이 그 한 예입니다. (459)
2000년이나 내려온 신학은 내용 면에서 다양하고 방대할 뿐 아니라, 꼭 그만큰 유연하기도 하지요. 신학은 특정 교리를 영구불변하는 진리로 주장하는 체계라기보다는, 그것의 시대적 해석이 적절한지 또는 수용 가능한지를 늘 질문하면서 성서와 전통적 사상들을 통해 부단히 재고해나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플라톤주의를 수용하여 신약성서의 정경화, 교회제도 확립, 사도신경 확정,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록 확립등을 이루어 냄으로써 기독교의 기반을 다진 사대교부들, 오리게네스 같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이러한 전통 안에서 형성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여 중세 가톨릭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또한 그렇지요. 또 “오직 성서로”를 외치며 성서해석에 특히 엄격했던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칼빈은 신의 계시는 당대의 문화와 형편에 맞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점을 참작하여 성서를 적절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지요. 그의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을 문자대로 이해하던 17세기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이 가톨릭 교인들보다 먼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성을 받아들이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놀드 토인비가 전체 기독교 신학의 탐구는 인간의 문명처럼 “어떤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며, 항구가 아니라 항해”라고 비유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지요. 기독교 신학은 항상 성서에 근거해야 하지만, 그것은 마치 역사학이 그렇듯이 언제나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창조적 상호작용 속에서 재해석. 재정립되기 때문이에요. 창조론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창조론 역시 성서 테스트와 전통적 신학 그리고 당대 학문과의 창조적 상호작용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마땅하지요. (461)
창조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하나도 빠짐없이 신의 특별한 목적과 섭리에 따라 이뤄진다고 내세우는 반면, 진화론은 자연을 설명하는 데 신과 같은 외부적 존재와 그에게서 주어진 목적 내지 법칙은 가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지점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한 자연의 맹목적성과 창조의 합목적성이라는 대립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룬 전통적 신학 이론은 없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런 문제는 제기되지 않은 탓에, 평생을 외부의 이교도뿐아니라 내부의 이단과도 논쟁하며 방대한 저술을 남기 아우구스티누스마저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요. 그럼 우리도 그처럼 성서 테스트와 전통적 신학 그리고 우리 시대 학문과의 창조적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하나 재해석해보자는 이야기지요. (462)
눈먼 시계공과 눈뜬 하나님 문제
양도논법이라고 불리는 딜레마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억는 상황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불리한 결론에 다다르게 함으로써 상대를 곤란에 몰아넣는 문제를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상충하지 않고 양립한다는 말로, 사람이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에보디우스의 연언전제를 논파함으로써 딜레마를 물리칩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행한다는 말도 옳고, 신이 그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말도 옳다는 내용이지요. 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같은 주장을 양립주의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의 예지와 상충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의 주장들을 말하지요. (467)
하나님은 미래사를 당연히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예정된대로가 아닌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게 된다. 하나님이 예지한다면 사람의 범죄는 자유의지가 아니라 예정되어진대로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 즉 자유의지로 죄를 짓는게 아니라는 결론.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지는 부정하거나 혹은 사람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 이 딜레마를 어찌 풀것인가?
윤리학자 해리 프랑크푸르트가 <<대안적 가능성들과 도덕적 책임>>에서 내세운 이론의 핵심은 설령 우리가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만일 우리가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의 행동이 자유롭다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프랑크푸르트 스타일’은 우리에게 양립주의가 모든 경우에 성립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특별한 조건’아래서는 성립할 수 있다는 의미 있는 사실을 가르쳐 주지요. 즉 강제하는 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 강제당하는 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한정된 상황’아래서는 양립주의가 문제없이 성립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은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지만 안간의 그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전제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는 같은 범주,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지도 않는다는 것이지요. (470)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
뱁새의 비행이나 개미의 노동이 그 당사자에게는 맹목적 또는신 본능적 행위일 뿐이지만 관찰자인 우리에게는 떼 이동이나 둥지 건축을 위한 합목적적 행위입니다. 뱁새나 개미들에게는 단지 맹목적적 행위가 낳은 우연적 결과겠지만, 우리에게는 합목적적 행위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가 되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뱁새나 개미와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무엇보다 지능적으로 전혀 다른 범주와 차원에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시공 밖’ 존재이고 인간는 ‘시공 안’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비유햇듯이 “마치 높은 망대에 오른 사람이 여행자들의 여정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눈에 직관하는 것 처럼 인식하지요. 한다미로 신과 인간의 인식은 판단의 범주와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프랑크푸르트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면 “그런즉 하나님은 모든 미래사를 예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원하는 것이다.” 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양립 주의적 교훈을 수긍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475)
‘에보디우스 딜레마’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법을 통해서 “유신론과 진화론은 양립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다윈은 “인간은 열렬한 유신론자인 동시에 진화론자가 될 수 있다”라고 답한 다윈의 양립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를 찾고자 합니다. (473)
당연히 몇천년 동안 이어온 인간의 자유의지와 유신론, 결정론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단지 이것으로 묶어 해결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말했듯 이것은 만용이며 어쩌면 인류의 역사에서 앞으로도 계속 치열하게 논쟁하고 격론을 벌일수 밖에 없는 주제이다. 하지만 다윈이 말한 이 놀라운 양립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복잡계의 자기조직화 현상은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앞서 <신은 존재다>에서 보았듯이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 엄연한 차이에 대해 “신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 상이성” 또는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 단호히 외쳤습니다. 또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신은 하늘에 있고 너능 땅위에 있다”라고 선포했지요. 우리는 키르케고르가 무한한 ‘양적 차이’라고 하지않고 ‘질적차이’라고 표현한 데 주목해야 합니다. 즉 인간을 극대화한다고 해서 신이 되는 게 아니고 시간의 극대화가 영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과 인간의 인식은 판단의 범주와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때문에 우리가 ‘프랑크푸르트 스타일’을 받아들에고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인정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은 모든 미래사를 예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원하는 것이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양립주의적 교훈을 수긍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474)
인간의 자유의지와 진화의 맹목적성은 둘 다 비결정적이라는 점에서, 신의 예지와 창조의 합목적성은 모두 결정적이라는 점에서, 두 문제는 똑같은 형식의 딜레마를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연의 맹목적성을 허락한 것이 신의 사랑에서 기인했다는 점도 똑같습니다.(476)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라는 딜레마는 신과 인간의 엄연한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많은 부분이 해소된다. 이와마찬가지로 진화와 창조의 딜레마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시각을 저자는 제시한다. 결국 진화의 맹목적성과 창조의 합목적성은 같은 범주나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 결국 신의 필연적인 섭리와 자연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우연의 법칙에 의한 진화가 대등하게 옳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의 필연성이 자연의 우연성까지 창조하고 지배하고 이끌어 간다는 의미라고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신의 필연적인 계획안에 진화의 우연성마저 포괄한다는 것으로 기독교인은 진화와 창조의 모순을 하나로 아우를수 있는 지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진화론의 내가 아닌 일반 기독교인들이라면.. 쉽게 수긍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창조의 목적은 구원
전통 기독교 교리가 지지하는 창조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물론이고, 동방정교와 서방 가톨릭이 고대로부터 취하는 일관된 관점은 창조의 목적을 구속사와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인간과 세계를 궁극적으로는 신성에 참여시키는 만물의 신성화를 위해 창조가 이뤄졌다는 주장이지요. 여기에는 분명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각함으로써 기독교의 창조론을 유대교의 창조 신앙과 구분 지으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480)
창조가 구속의 시작이라는 오리게네스의 주장은 대부분의 위대한 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창조된 모든 것에서 출생과 완정성의 목적은 행위하는 자 또는 출생시키는 자의 형상이며, 그것들은 바로 그 형상의 유사성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제1작용자, 즉 신의 형상은 그의 선성 이외의 다른 것이아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신의 선성과 닮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만들어졌다.”(482)
불완전한 피조물인 우리는 신의 온전함에 도달하는 것, 신의 선성을 닮는 것, 곧 ‘구원’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정리할수 있다. 앞장에서 서술한 대로 신과 인간은 그 아득한 간격만큼이나 시공간과 차원이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다. 신은 인간에게 사다리를 통해 자기의 완전함에 도달할 수있는 길을 내어주었으며 이곳을 따라 자기에게 올라오도록 예지한 것으로 봐야 한다. 나는 이것을 구원으로 이해한다.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칼 바르트도 창조를 신과 인간사이에서 이뤄지는 구원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시발점으로 보았어요. 창조가 없었으면 구원 사역도 불필요했다는 게 바르트의 논리입니다. 신학자들이 공연히 성서에 꿰맞춰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한 편의 드라마를 쓰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이 이런 입장을 견지하기까지, 그 과정이 그리 순탄지만은 않았어요. 기독교가 탄생했을 때 초기 교부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차이점을 극복하는 것이었어요. ‘창조의 신’과 ‘구속의 신’,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사랑과 은총이 넘치는 ‘보편적인 하나님’ 사이에 놓인,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본질적 간격을 해소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기 때문에 차라리 이둘을 아예 분리시키자는 발상이 자연스레 흘러나왔습니다. 당시 교부들은 사력을 다해 마르시온과 맞서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 창조의 신과 구속의 신은 하나라는 교리를 지켜냈습니다. 우리가 창조의 나쁜 신과 구속의 좋은 신을 갖지 않기 위해, 그리하여 구약과 신약을 분리하지 않기 위해 창조의 신과 구속의 신은 하나여야 하고 창조의 목적이 곧 구속이어야 했던 것이지요. (484)
완전한 신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계구원입니다. 신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야기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엉뚱하게도 <<고백록>>의 말미에 자서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창조에 관한 신학을 덧붙였는가? 에 대한 답변입니다. 불온전한 자기 자신이나 세계가 신처럼 온전해지는 것은 모두신의 은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진정하고 싶었던 말이지요. (485)
4부
신은 인격적이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세네카에게 죽음은 로고스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로고스는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신의 섭리이지요. 이 섭리는 세계에는 그 세계를 창조하고 움직이는 ‘자연법칙’으로 인간에게는 ‘도덕법칙’으로 작용합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자연법’이라고도 불렀던 이 도덕법칙에 마치 자연이 자연법칙에 대해 그러하듯이 순응함으로써만 덕스럽게 될 수 있지요. 신의 법인 ‘자연법’이 인간들의 ‘실정법’보다 우선되는 것은 서구에 내려오는 오랜 전통입니다. (498)
세네카는 섭리를 필연적인 것, 즉 운명으로 생각했는데요, 이는 스토아 철학의 전통이기도 했습니다. 섭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분개하고 불평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 참기 견뎌야 하는 신의 뜻이지요. 고대철학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도사린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의 비법은 섭리를 따르는 것이었지요. (504)
스토아 철학자들은 스스로 고통을 극복했기 때문에 고통을 아예 모르는 신보다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세네카는 참된 스토아 철학자는 ‘신들 위의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런 사유를 근거로 그들 자신이 신이 되거나 또는 그보다 더 우월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은 겁니다. (505)
이 철학이 당연히 지금의 종교로서 혹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주의 황제를 보며 감탄하고 또한 열광했던 이유는 바로 조직과 국가의 리딩그룹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바로 이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수가 초인이 될수 없다면 적어도 리더들은 반드시 이와 같은 절제와 용기가 필요하다. 파울틸리히가 말했듯이 기독교의 진정한 적수는 아우렐리우스 같은 젊잖은 스토아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스토아 철학이 사라진 지금의 현재가 결국 빨간 십자가로 뒤덮인 우리나라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바울의 ‘예정’
바울은 인간의 모든 일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으며, 이에 대하 누구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질수 없다고 가르친 겁니다. 요컨에 바울에게 신의 예정은 신의 자유롭고 기쁜뜻에 근거한 것이므로 주권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영원불변적이고 불가항력적이지요. 세네카와 바울은 가르침은 매우 닮았어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은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 이론이 초기 기독교 교의학과 윤리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많은사람이 바울이 기독교에 그리스 철학을 끌어들인 원흉이자 시조로 규정하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사실상 바울은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난 적이 없고, 예수의 가르침을 읽거나 전해들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제자들과도 종종의견이 달랐으며 예수의 친동생인 야고보를 힐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로부터 그의 제자로로 이어진 ‘팔레스타인 전승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지요. 루돌프 불트만은 “바울에게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은 별다른 역활을 하지 않거나 실질적으로 아무 역활을 하지 않았다”라고 단정지었습니다. (513)
** 바울의 서신은 예수 사후 20년쯤에 쓰여 1세기 말 이미 ‘바울 전집’이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에 비해 예수의 말씀에 대한 기록은 사후 크게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사도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 직접 목격담이 희미해짐에 따라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로마 기독교인들이 베드로의 동역자이자 통역자였던 마가에게 부탁하여 1세기 후반 처음으로 마가복음이 쓰였고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가 ‘2부의 역사서’로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쓰였다. 시리아 지방의 기독교인들에의해 보존된 이방인 설교에 중점을 둔 마태복음이 나타났다. 1세기 말엽이 되어서야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에 의해 쓰인 것” 요한복음의 기록이 에베소에서 나타났다.
바울이 자기 사상으로 예수의 복음을 윤색해서 기독교를 일구었다는 게 바울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비평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지요. 하지만 바울의 가르침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용어와 수사학적 표현 형식에서 그랬을 뿐이며 내용에서는 구약성서와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에 닿아 있고,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초석이 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20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기독교는 4복음서 외에도 구약성서,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기록, 수많은 교부와 신학자들의 연구가 누적되어 형성된 종교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도들에 의해 전해진 복음과 그에 대한 해석이 규범하는 규범이 되어 그밖의 모든 규범된 규범들을 제한한 것입니다. 2세기부터 4세기까지 전행된 ‘신약성서의 정경화’가 그 좋은 예입니다. 정경이라는 개념 가체가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외부 이교도와 내부 이단의 도전에 대처하자는 노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3세기에야 인정된, 몇몇 서신을 제외한 바울의 서신들은 4복음서와 함께 2세기에 이미 첫 번째로 정경에 포함되었습니다. 즉 바울이 전한 신앙의 열매들이 비록 그리스 철학적 용어와 표현 형식이라는 그릇에 담겼다 해도, 예수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었다는 뜻입니다.(515)
세네카 섭리 사상의 근원은 플라톤 철학이지요. 플라톤은 중기의 대화편 <<국가>>에서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를 ‘이데아의 이데아’인 ‘선의 이데아’로 규정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선한 섭리가 현세와 내세의 모든 과정을 지배한다는 낙관적 신념을 서구사회에 심어놓았지요. 플라톤은 자연신학의 창시자이며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부동의 운동자’라는 개념으로 계승해 다시 세네카에게 전해진 겁니다. 세네카가 말하는 섭리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치 자연법칙처럼 우리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법칙일뿐 우리의 희망과 절망 그리고 소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세네카의 섭리와 바울의 섭리 사이에 존재하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은 각각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이 인격적이냐 아니냐 하는 차이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517)
칼빈의 ‘섭리’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규범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서 섭리를 창조와 특별히 연관 지어 다음과 같이 썼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논할 때, 이말이 하나님께서 천국에 안일하게 앉아서 땅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방관하신다는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모든 사건에 대처하려고 키를 잡은 배의 선장과 같은 분이다.” 섭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떤 외적 영향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삶에서 겪은 숱한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자라났음을 알 수 있지요.(518)
신학이든 법학이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공부했다는 이야기지요. 그럼에도 이때 그가 공부한 신학과 법학은 훗날 훌륭한 라틴어 사용자가 될 어학적 기량과 논쟁에서 많은 적을 물리칠 만한 수사학적 기반을 닦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시절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라틴 교부들의 저서를 탐독했고, 라블레와 에라스무스의 저서를 통해 당시 유행하던 인문주의를 접했으며, 루터의 종교개혁에도 상당한 흥미를 가졌습니다. 회심 이후 그는 평생 동안 “오직 성경으로”라는 구호를 따른 엄격한 성서주의자로 살았지만, 동시에 뛰어난 인문주의자기도 했지요. (520)
칼빈은 스토아 철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세상과 인간을 지배하는 초자연적 섭리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는 칼빈이 회심하기 전부터 이미 세네카를 통해 신의 섭리에 관심을두었으며, 또한 그의 섭리론이 다른 종교개혁자는 물론 세네카로부터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줍니다. 그는 섭리를 세 가지 측면으로 분류했습니다. 일반섭리(자연의 질서- 신은 모든 행위의 가장 우선적.직접적 목적을 남겨 둔 채 자신이 창조할 때 부과한 법칙들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면서 역사한다) 둘째는 ‘특별섭리(신은 자신의 종을 돕고 악인을 응징하며 신실한 성도의 인내를 시험하거나 벌을 내려 공의의 심판을 실현), 셋째는 ‘성령의 내적 작용(신은 성령을 통해 그가 선택한 자들을 감화시키고 다스려서 거듭나게 한다는 것) 입니다. 스토아 철학과는 달리 신은 자신이 부과한 자연 법칙들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면서 역사한다는 칼빈의 일반섭리에 대한 주장은 세네카의 영향이 분명히 느껴질 만큼 스토아 철학적입니다. 세네카가 ‘운명(fatum)’이라고도 부른 스토아 철학적 섭리는 그야말로 우주적 보편성을 갖고 있어서 어떤 것이든 그 직접적 인과관계에서 벗어 날 수 없는 질서이기 때문이지요.(523)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바울 신학의 위대한 계승자로 불리는 칼빈이 자신의 신앙 모델로 사도 바울이 아니라 다윗을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회심이 바울처럼 극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점진적으로 일어났음을 표현한 것이라는게 신학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럼으로써 회심이 신의 섭리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고, 순간적일 뿐 아니라 점진적일 수도 있으며, 외적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적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칼빈은 자신의 개종을 통해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지요. (524)
칼빈에게 중요한 일들은 평생 동안 정작 자신의 의지와는 별 관계가 없이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객관적으로 보면 그건 칼빈의 소심하고 나약한 성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 자신도 그것을 인정했고요. 중요한 것은 칼빈 자신이 그 모든 일이 수치스럽거나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저항하지 않고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지요. 칼빈은 자신을 강제하는 신의 손을 “요망스럽게도” 뿌리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신의 손에 맡겼던 것이지요. 그것이 그를 위대한 종교개혁자로 남게 했습니다. (527)
세네카와 바울 그리고 칼빈을 통해 인간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인간의 삶에 참여하고, 그 출생부터 죽음까지 ‘끊임없이’ 인도하는 신의 어떤 속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그 속성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선으로 이끈다는 것도 살펴보았지요. 그들이 ‘운명’이라 했든 ‘예정’이라 했든 아니면 ‘섭리’라고 했든,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러한 신의 속성을 신의 ‘세계내재성’ 또는 ‘인격성’이라고 부릅니다. 신의 인격성은 종교로서 기독교를 이루는 근간이자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우리는 신의 인격적 속성을 통해서만 신을 실제로 만날 수 있는데 신에 관한 직접적 경험 없이는, 비록 신을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종교적으로 신앙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철학자의 신과 종교인의 신, 아테네의 신과 예루살렘의 신이 판이하게 갈라서는 분기점이지요.(528)
아테네의 신
그리스인들은 철학의 천재들이었지 종교의 천재들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최고의 존재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세계와 인간 삶에 관한 모든 지혜를 계시로 받고 있을 때,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사변적 세계 안에서 신들에게 어떤 위치를 부여할 것인가를 이성으로 사고하고 있었습니다. (529)
플라톤에게 신이라는 개념은 매우 다양했기에, 그의 세계도 호메로스와 탈레스의 세계만큼이나 신과 신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질송은 “모든 사물이 신들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을 탈레스 이후에는 플라톤이 유달리 거듭했다”라고 표현했지요. 이와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분히 신화적 요소를 갖고 있던 그 당시 유무형의 신들을 떠나, 신을 ‘부동의 운동자’로 규정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부동의 운동자’는 언제가 있었고 또 언제나 있을, 영원히 세계에 작용하는 ‘원리’로서 자기 자신과 세계를 구별할 줄도 모르며, 또 한 세계 안에 있는 존재물들을 돌보지도 않지요. 아리스토델레스의 영향을 받은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가 계승하고 설파한 이른바 “걱정없는 신”이라는 개념이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530)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세계를 돌보는 일이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으로 주어졌지요. 그는 위대한 스승 플라톤이 한 권도 쓰지 않은 윤리학 책을 세 권이나 썼습니다. 인간이성에 의한 인간구원’의 길을 닦기 시작한 것이지요. 질송은 이 정황을 적절하고도 날카롭게 평가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그리스인들은 다툴 여지도 없이 이성적 신학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상실해 버렸다.” 이성적 신학은 보통 자연신론이라고 합니다. 자연신론에서 신은 야훼처럼 창조주이며 세계를 초월하지요. 그러나 그는 야훼와는 달리 자신이 창조한 세계와 인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세계는 오직 그가 만든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에 의해 자동으로 운행될 뿐이지요. 그래서 자연신론자들은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17-18세기 영미 자연신학자들과 프랑스. 독일의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한 이신론이 그 대표적 예지요. 자연신론은 중세 1000년간 기독교에 억눌려 지하에서 잠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대가 지작되면서 인간이성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했지요. 현대의 많은 과학자나 과학주의 철학자가 그렇듯이 17세기에는 로크, 볼테르, 뉴턴 같은 당대 최고 지식인들이 이러한 신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흔히 ‘철학자의 신’이라고도 부르는 이 신에 대해,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간명하게 설명했지요. “신은 그 실체들을 창조하고 필요한 법칙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법칙을 그들자체에 맡기고 그들 자체에 대한 작용 가운데서 유지되게 하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533)
세네카가 인간은 신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때 거기에는 신의 보살핌을 믿거나 그에게 의지한다는 뜻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아요. 인간은 오직 자기 정신 안에 들어와 있는 로고스인 이성을 믿고 도덕법칙에 의지해야 하지요. 그에게는 그것이 신에게로 다가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토아학파의 섭리와 기독교의 섭리가 여지없이 갈라서지요.(535)
눈얼음 계곡 건너가기
플라톤의 분여이론이 뜻하는 것처럼, 신은 만물을 창조할 때 완전성의 정도가 높 것부터 나은 것까지 계층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여했지요. 그 결과 존재의 세계에는 신과 유사한 높은 존재들부터 덜 유사한 낮은 존재들까지 계층적으로 구성된 파리미드형 존재의 사다리가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통해 피조물들에 각인된 이사다리를 인식함으로써 존재의 사다리를 올라가 궁극적으ㄹ는 신에게 도달할 수 있었지요. 중세신학자들이 “피조물의 사다디를 통한 정신의 신을 향한 상승이라는 구호로 요약했고, 존 밀턴이 실낙원에서 예찬한 이 론을 가톨릭 신학자들은 ‘존재유비’라는 멋진 이름으로 부릅니다. 신과 그의 피조물이 분여에 의해 양적으로만 다를 뿐 질적으로는 같다는 전제에서 나온 매우 흥미로운 생각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존재 유비 교리를 따르면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은총에 ‘전적으로’ 맡겨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이성에 달린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위험은 그리스 철학에서 나온 ‘존재의 사다리’ 개념이 기독교에 들어온 이래 항상 존재했지요. (537)
**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의 계층적 질서를 플라톤의 분여이론에 근거해서만 이해했다. 하지만 토마스아퀴나스는 ‘분여’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사’개념까지 접목, 확장해서 이해했다. 분여된 것들은 적든 많든 원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존재유비’이론이 나왔다.
신에게 가까이 갈수록 더욱 정화되고, 영화되고, 순화되어 마침내는 각 종류마다 그에 알맞은 한계 안에서 육체가 영으로 승화한다”라는 말은 분명 신플라톤주의적이거나 자연신론적인 발상이지요. 이러한 구원의 메커니즘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끼여들 틈이 아주 좁아지거나 아예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중세 이후 가톨릭 신학의 근간이 된 ‘존재 유비’라는 교리에는 이 같은 자연신학적 위험이 크든 작든 언제나 도사리고 있지요.(539)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선언했듯이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지요. 왜냐고요? 일찌기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라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지요.(544)
예루살렘의 신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성으로 그 답을 찾았을 때 그들은 신의 침묵을 경험했지만, 히브리인들이 신앙으로 그 답을 찾았을 때 그들은 신이 말을 걸어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구약성서에 기록된 계시지요. 야훼는 아리스토텔레스나 18세기 자연신학자들의 신처럼 인간과 세계를 초월하는 3인칭의 신이 아닙니다. 그는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의 삶과 역사에 부단히 참여하여 관계를 맺는 2인칭의 신, 즉 ‘신적인 너’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언제나 ‘나의 그것’이 아니라 ‘나와 너’라는 인격적 입장에서 파악했지요. 그리고 이러한 전통이 신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수에 의해 극대화되어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시선을 누구보다도 예수에게 집중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히 신의 초월성보다 인격성이 더 부각되었고 신과의 사귐이 더 친밀해졌지요. 신을 부르는 호칭에서도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46)
히브리인들은 원래 신의 이름 부르기를 대대로 두려워하고 꺼렸습니다. 특히 바빌론의 유배이후의 후기 공동체에서는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단 한 번 부르는 것외에는 금지되었지요. 대신 ‘나의 주님’을 뜻하는 ‘아도나이’라는 말로 ‘야훼’를 대신했습니다. 그것도 성서를 읽을 때만 사용했을 뿐 평소에는 그조차 송구스러워 아도셈 즉 ‘나의 주님의 이름’이라 불렀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야훼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던 이 단어는 6세기경부터 히브리어 자음 ‘YHWH’에 아도나이의 히브리어 모음인 e,o,a를 혼합한 YeHoWaH(예호와흐)로 모습을 바꿔 조심스레 사용되었지요. 그런데 1518년 교황 레오 10세의 고해신부이던 갈라티누스가 이 철자의 라틴어식 발음 표기를 ‘Jehovah(예호바)’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예호바의 영어식 발음이 ‘지호버’이고 한글식 발음이 ‘여호와’인 것이지요.(547)
구약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신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보살피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파악했어요.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신을 각각의 개개인을 이끌고 보살피는 ‘우리 아버지’ 혹은 ‘나의 아버지’로 인식합니다. 그는 신을 ‘아바’라고 불렀는데 아람어인 이 말은 ‘아빠’ 또는 ‘아버지’를 뜻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보통 자신의 친아버지를 부르거나 칭할 때 사용하던 용어지요. 예수는 이것을 신에게도 거침없이 사용한 겁니다. 이로서 신의 인격적 속성이 극대화되었고, 신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 역시 부모와 자신의 관계로 최대한 강화되었습니다. 칼빈의 말대로 신은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아버지라 불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를 통해 인간의 사진으로서 의무 역시 최대한 강화되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예수는 ‘우리 아버지’와 ‘나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모두 사용했지만, 고대 기독교 사회에서는 ‘나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피하고 주로 ‘주로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이지요. 그것은 기독교 교회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공동체성의 강조’가 무엇보다도 중요시되었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점차 가톨릭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549)
종교개혁 이후 만인사제주의를 주장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설사 관용적으로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대부분 ‘나의 아버지’라는의미로 쓰지요. 신의 인격성이 그만큼더 강조된 것입니다. (550)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
신인동형설과 신인동감설은 모두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외형적이로나 내면적으로 인간과 같은 속성을 완전한 형태로 갖고 있는 것은 예컨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이거나 ‘이상화된 인간’일 뿐,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아니지요. 구약성서에서는 분면 신을 신인동형적으로 그리고 신인동감적으로 표현했지요. 그렇지만 그것들은 모두 신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아니고,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놀랍고도 신비로운 체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면서 사용한 비유일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성서에 나나탄 , 신에 대한 신인동형적 내지 신인동감적 표현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자신을 인간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계시 또는 선포하려는 지혜에서 나왔을 뿐, 신이 인간처럼 생기거나 인간처럼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555)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란 단순히 신이 피조물들에게 ‘참여와 인도’라는 원리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신이 존재인 한 신은 존재하는 모든 존재물의 존재에 ‘이미 그러나 언제나’ 참여하고 있습니다. 신이 생성.작용하는 한, 신은 피조물들의 모든 변화를 ‘이미 그리고 언제나’ 이끌고 있지요. 그럼으로써 신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합니다. “모든 것을 통해 모든 것 안에 존재”하면서 “유지하며 조월하고 포괄하며 관통하는” 존재론적 원리를, 구약성서에서 야훼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라는 단 한마디 약속으로 계시했습니다. ‘함께하리라’가 바로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나타내는 탁월한 성서적.존재론적 표현이지요.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모든 계시는 바로 이 같은 신의 참여와 인도에 대한 약속이자 기록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서에서는 어떤 사건이나 사물도 우연적인 것이 아닌,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신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에 따라 작정된 것임을 나타내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557)
기도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란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지요. 고대의 자연신론자들이 그랬듯 근대의 이신론자들 가운데도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기도에 어떤 요구를 포함시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지요. 그들의 신은 “세계에 대한 어떤 관심도 없이 하늘에서 한가히”지내기 때문입니다. (559)
신은 자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에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답이지요.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신의 절대적 독립성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기도를 통해 신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 되므로 신의 절대성과 독립성이 손상되지요. 신이 인간을 오직 자신의 섭리에 따라서 ‘강제적으로’ 이끈다면 신과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인격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또 어자피 자신의 목적에 맞게 강제하려면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기도를 하라고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이처럼 신의 인격성과 섭리는 ‘기도’와 관련해서 적어도 이 두 가지 문제로 서로 부딪치지요.(560)
신의 섭리에 의한 강제는 선한 목적과 의도에 따른 것이어서 신의 인격성을 더 잘 드러낸다는 말이지요. ‘섭리’는 ‘삼위일체’처럼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하지만 둘 다 기독교 교리들을 떠받치는 튼튼한 기둥이지요. 섭리의 어의적 의미는 ‘미리 보는 것’인데,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신이 인간과 교회 그리고 세계를 미리 정한 목적에 따라 이끄는 의지로 해석합니다. 기독교인에게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인격성을 믿는 것이자 곧 그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전능하고 신실하여, 설사 내가 “이 눈물 골짜기에서 악한 일을 당하게 하실지라도 그것이 변해 선이 되게 하실 것”을 믿고 의심치 않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그의 뜻에 맡긴다는 의미지요. (563)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면서 세 번 기도합니다. 이때 그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부르짖었지요. 견딜 수 없는 공포와 전율 속에서도 신의 섭리를 믿고 따르려는 거룩한 기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바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지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가르침을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요. 기도는 우리가 신을 조종하는 도구가 아니라 신이 우리를 조장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야만 기도가 우리를 자신의 뜻과 의지를 따려는 자율적 인간이 아니라 신의 뜻과 의지를 따루려는 신율적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지요. 또한 그래야만 기도가 신을 우리처럼 속되게 만드는 계기가 아닌, 우리를 신처럼 가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래야만 우리가 파멸에 이르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 567)
강한 섭리, 약한 섭리
신은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데도 우리가 신의 섭리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신은 지식과 선함과 의지에서 무한하지만 인간은 유한하다는 전제 때문이지요. 이처럼 강력한 섭리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모순에 도달합니다. 즉 그릇됨이 전혀 없고 전지전능한 신이 오직 자신의 섭리로만 인도하고 통치한다면, 인간은 신이 자기 형상을 따라 만든 창조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단지 신이 부리는 자동인형에 불과하지 않는나냐는 반론이지요. 이런 생각을 가진 학자들은 신의 섭리에 대해 ‘신이 아직 모든 결과를 알지 못한 채 자유로운 피조물들의 반응에 따라 결과가 나오도록 조정해 놓은 것’이라는 이론을 내세웁니다.(약한 섭리) 섭리와 자유의지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대립때 핵심이었으며 가까이는 종교개혁 갈등 의 중심에 놓였던 매우 오래되고 중요한 주제이지요. 전통적으로 중요한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강한 섭리론’을 지지했으며 강한 섭리론 안에서도 신의 섭리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신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우리 삶에 항상 참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지요. (574)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원하던 응답을 받으면 받은 대로, 또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하는 대로 그 결과를, 자신을 향한 신의 섭리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이루어졌든 이뤄지지 않았든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의 섭리로 확인하는 일은 기독교인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교훈했지요. “신으로부터 획득하기 위한 기도는 기도하는 자 자신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하다. 그 자신이 자기의 결함을 고찰하고, 기도함으로써 얻기를 소망하는 것을 경건하게 바라도록 자기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는 받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신의 섭리를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바로 이것이 관건입니다. 그래요 이건 분명 체념입니다. 그것도 무한한 자기체념이지요. 알고보면 신을 믿고 그의 섭리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디 극단적 자기체념을 전제합니다. 세상 누구든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신을 믿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신의 절구에 자신을 집어넣어 부서지고 빻아져서 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게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577)
스토아 철학자들도 체념과 자족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었고 그럼으로써 심지어는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요. 기독교 교리에 따르는 인간은 이성과 도덕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지요. 구원은 오직 믿음과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성적 체념을 통해 마음의 평정은 얻을지 몰라도 기독교인들이 얻는 구원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578)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성숙단계를 심미.윤리.종교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심미적 단계의 인간은 육체적이든 지적이든 가리지 않고 행복이라는 관념 아래서 여기저기를 쫓아다니지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감성만이 아니라 영성도 있기 때문에 심미적 단계의 사람은 언젠가는 마치 고향을 떠난 사람처럼 말할 수 없는 향수, 우울, 불안에 빠지게 되지요. 세네카는 네로 같은 향락주의자들은 “살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죽을 줄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평했지요. 그래서 이들은 항상 삶에 대한 불안과 절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다고도 주장했습니다. (582)
사람들은 대부분 무절제한 욕망으로 허덕이는 ‘폐허 속의 삶’에 절망해 언젠가는 뉘우치게 되지요. 이 뉘우침이 <심미적 단계>의 인간을 다음 단계로 상승시켜 <윤리적 단계>에 이르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비로소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범주 아래 처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지요. 한마디로 뉘우침이 인간을 ‘천장이 과히 높지 않은 지하방’으로부터 해방시켜 윤리라는 햇볕 아래 서게 한다는 말입니다. (584)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심미적으로 사는 사람은 마치 “국토 없는 국왕”처럼 일체를 외부에 의존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라는 신조로 사는 그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스스로 갖지 못하며,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진실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지요. 따라서 그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끝 간 데 없는 병적 불안감은 여기서 기인합니다. 이에 반해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을 통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일체를 자신의 선택에 의존하지요. 그는 ‘국토 있는 국왕’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자기’, 곧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이 “꽉 붙들 수 있는 한 점”은 개별적인 ‘자기’가 아니고 보편적인 ‘자기’입니다. 이는 <윤리적 단계>의 목표가 인간의 삶이 이성에 의해 보편적인 것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인생을 윤리적으로 보는 사람은 보편적인 것을 보고,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표현한다. 세네카가 교훈한 것처럼, <윤리적 단계>에 들어선 인간은 보편적 이성(로고스)의 소리, 즉 윤리적 규범과 의무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요. ‘이성의 소리’에 따라 사람들은 가정과 사회를 돌보면서 살고, 때로는 그 이성을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높은 윤리적 삶을 이루기도 합니다. (587)
아가멤논, 옙다, 브루투스 이 세사람은 자기 내면에서 울리는 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세네카가 <<섭리에 대하여>>에서 언급한 대로 그들에게 다가온 운명이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용기를 갖고 참고 견디었다”는 점에서 분명 스토아주의적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이들같은 이성적.윤리적 영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성의 소리란 인간이 매번 자신의 실존적 나약함을 극복해야만 따를 수 있는 엄숙한 윤리적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윤리는 “주인공의 허약한 어깨에 거대한 책임을”지웁니다. 따라서 이 쇳덩이처럼 무거운 짐을 지지 못하고 쓰러지는, 나약한 우리들은 ‘뉘우침’을 거쳐 ‘죄의식’이라는 더 깊고 새로운 절망에 다시 빠지게 되지요.<윤리적 단계>에서 일어나는 뉘우침은 내면에서 울리는 이성의 소리에 따르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뉘우침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 탓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죄의식으로 이어지며, 여기서 오는 절망은 <심미적 단계>에서 겪는 절망보다 더처절하고 깊을 수밖에 없지요.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아가멤논, 옙다, 브루투스 같은 이성적.윤리적 영웅들은 죄의식에 빠진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 주기 보다는 오히려 절망의 그림자를 더 짙게 드리울 뿐이지요. (591)
이성적.윤리적 영웅이 아닌 우리는 그저 쓰라린 ‘뉘우침’과 ‘죄의식’만 가슴에 품고 깊은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할까요?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뉘우침이란 본디 최고의 윤리적 표현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자기부정입니다. 이 최고의 자기부정을 그는 “무한한 자기체념”이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을 <종교적 단계>로 이끈다는 겁니다. 인간은 우직 뉘우침과 죄의식이라는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게 되며, 그제야 비로소 신을 발견하게 되고,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헌신하고 <종교적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키르케고르에게는 신을 믿는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자, 그가 “무한한 체념 속에서는 고통 속에서의 위로와 평화와 인식이 있다”라고 말한 뜻입니다. (593)
두려움과 떨림
부조리란 말 그대로 ‘조리에 맞지 않음’ 또는 ‘이성에 의해파악되지 않음’, ‘비합리적임’을 의미합니다. 키르케고르는 물론이고 그 후계자인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부조리는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삶이 가진 이해 할수 없음’을 뜻하지요. 그런데 바로 이 ‘이해할 수 없음’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불안”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세계와 신의 모순성 때문에 자신의 삶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가 불안이 자리잡고 있지요. (596)
그는 아가멤논, 예다, 브루투스와 같은 이성적. 윤리적 영웅들이 간 길로 가지 않고, 오히려 신을 믿는 보통사람들이 걸어야 할 새로운 길을 열었지요. 똑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선택한 길은 오히려 일체의 이성, 일체의 인간적 타산, 곧 자기자신을 철저히 부수고 버리고 체념하는 것이었습니다. (600)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아가멤논과 옙다와 브루투스는 개인의 한계를 초극하는 보편적 윤리는 갖고 있었지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초인적 신앙은 없었지요.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이삭을 요구하신다면 그는 언제든지 이삭을 기꺼이 바칠 생각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을 요구하지 않으시라는 것을 그는 믿었다. 그는 부조리의 힘을 믿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인간적 타산이 문제 될 여지가 없었고, 그에게 그 요구를 하신 하나님이 다음 순간에 그 요구를 철회하신다면 그것이 바로 부조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산에 올랐다. 그리고 칼이 번쩍이는 순간까지도 그는 믿었다. 하나님이 이삭을 요구하시지 않을 것이라고.(603)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는 스스로 아들을 죽여야 한다는 상황의 ‘터무니없음’을 이해할 능력이 없었고, 그것을 견딜 만한 힘이 전혀 없었지요. 그런데도 그는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그로부터 믿음의 자손 곧 ‘제 2의 인류’가 비로소 생겨난 겁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제 2의 인류는 무한히 자기를 체념하는 자기파괴자들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바랄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광기 있는 자들이고, 자신을 미워함으로써 졀국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여, 신의 섭리를 믿는 현명한 자들이지요. (606)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이성적.윤리적 영웅들이 가졌던 것은 ‘윤리적 우월감’이지 ‘죄의식에 의한 절망감’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인간에게는 ‘윤리적 우월감’이 있을수 없고, ‘윤리적 우월감’을 가진 이들에게는 ‘신에 의한 구원’이 없습니다. 이 말을 키르케고르는 “종교적 실존자는 고뇌를 통해 현실성을 갖게 되며, 고뇌가 없어지면 그의 종교적 생활도 함께 끝나는 것이다”라고 했지요. 키르케고르에게 종교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는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608)
아브라함에게서 보듯이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609)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성과 도덕을 통해 얻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구원과 은총이지요. 그들이 신을 단순히 인간이 따라야 할 ‘자연법칙’ 내지 ‘도덕법칙’으로 파악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신의 숭고한 팔을 스스로 놓아 버린 겁니다. 18세기 이신론자들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성과 도덕을 통해 신을 찾아가려는 사람들이 언제나 도달하는 ‘황량한 종착역’이지요. (609)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부단히 참여하고 부단히 인도한다는 뜻에서 인격적이지요. 그렇지만 신은 오직 자신의 섭리대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궁극적 선을 이루지요. 여기에는 어떤 타협이나 침해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의 기독교적 의미지요. 따라서 기도로 신의 섭리를 깨닫고 자기체념으로 그것을 따르는 사람은 욥이나 하박국이나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키르케고르가 역설한 구원, 자신마저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을 신이 용납하는 구원을 경험하게 되지요. 이러한 체험,자족, 지혜, 구원을 위해 기독교인들은 신에게 기도하는 겁니다. 다시말하자면 이러한 체념, 자족, 지혜 구원을 자기백성에게 주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지요.(608)
5부
신은 유일자다
<<국가>>를 쓰기도 한 플라톤은 천상세계뿐 아니라 지상세계에도 아주 큰 관심을 보인 만면, 플로티노스의 관심은 온통 천상세계의 영혼과 영원한 시간에 쏠려 있었어요. 그래서 본의아니게 그는 플라톤의 개념과 사상들을 자기 취향에 맞게 변형해서 가르쳤지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플라톤주의라고 부르는 사상의 핵심입니다. (617)
그는 항상 마음이 ‘시간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태양의 회전 운동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시간을 만들어 내지요. 마음이 없으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은 마음 안에 있고 마음과 하나지요. (618)
‘일자’에 대한 고대철학 이론들이 기독교에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을 할때 ‘유일자’가 갖는의미와 깊게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플로티노스가 태어나기전, 적어도 그 1500년 전에 모세 의해 이미 선포되었지요. 신의 유일성을 계시한 성서를 설명하는 신학적 기반은 훗날 암모니오스 사카스의 두 위대한 제자들의 작업에 의해 구축되었습니다. 우선 오리게네스가 기독교 최초의 조직신학서라고 할 수 있는 <<원리론>>을 쓰면서 삼위일체 신 가운데 성부를 플라톤의 ‘선자체’ 곧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와 동일시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그 내용을 풍성하게 채운 것은 플로티노스의 일자 형이상학이었지요.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대부분 우리가 신플라톤주의라고 부르는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에기록된 이론을 도구로 사용해서 그들의 교리와 사상을 정립했습니다. 특히 6세기 초에 위-디오니시우스 라는 사람이 나와 플로티노스의 일자 형이상학을 기독교 신학에 깊숙히 침투시켜 동방정교의 근간인 부정신학을 개척했지요.(621)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에는 플라톤의 ‘선자체’나 플로티노스의 ‘일자’가 가진 심오한 의미가 분명히 담겨 있지요. 더욱이 그 말에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을 통해 부여한 고유의 의미도 함께 들어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일신 개념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우선 플라톤과 플로티노스가 규정한 일자의 의미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뿌리인지 아닌지를 자세히 알아봅 겁니다. (624)
8장 일자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일자
플라톤의 존재인 ‘이데아’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가 가진 ‘불변’과 ‘진리성’을 갖지만 ‘단일성’과 ‘통일성’은 갖지못합니다. 이데아는 자기 자신을 사물들에게 나눠 줌으로써 다수의 사물이 존재하게 하므로 단일할 수가 없지요. 즉 이말은 동시에 이데아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일자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신은 존재다>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만물의 궁극적 근거는 오직 하나여야 하기 때문이지요.(627)
플라톤의 이데아론(분여이론)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으로는 존재물들의 질적 다양성을 설명할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플라톤의 고안해낸 ‘천재적 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론을 따르면 뜻밖에도 이데아는 만물의 근원인 일자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지요. (628)
이데아가 모든 존재물의 긍극적 근거인 일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각각의 개별적 사물의 근거인 이데아의 세계 외에 그 이데아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실체를 부득히 설정해야만 했습니다. 이데아를 넘어 그것들의 근거가 되는 궁극적 실체를 ‘선자체’또는 ‘선의 이데아’라 규정했든 것을 떠올리며 ‘선자체’를 일자이자 만물의 궁극적 근원으로 확정했습니다.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형이상학>>에서 플라톤 이론에는 현상계와 이데아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와 이데아계 그리고 일자, 이 세 단계로 이뤄졌다고 밝히면서, 이 가운데 “일자가 선자체다”라고 명시했습니다.(630)
플라톤이 중기 대화편<<국가>>에서 확립한 ‘선자체’는 모든 이데아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이데아 중 이데아’로 실체 중 실체입니다. 태양이 가시적 세계의 만물에 생육과 자양을 주듯이 ‘선자체’는 가지적 세계의 모든 이데아에 존재와 본질을 부여합니다. 선자체의 본성은 사고의 영역을 벗어나며, 언어 형식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미”로 권능과 위엄에서 모든 이데아를 능가하지요. (631)
일자는 영원불변성, 불가지성 및 불언명성을 가진 가장 완벽산 실재다. 선자체도 그렇다. 그러므로 일자는 선자체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형식적 오류입니다. A는 C이다 B도 C이다. 따라서 A는 B이다. 이는 A는 C이고 C는 A이며 동시에 B는 C이고 C는 B이다. 그러므로 A는 B이다 라는 형식이 되어야 합니다. 논리학에서는 이를 동치(equivalence)라고 합니다. 플라톤은 왜 논리적 오류를 무릅쓰면서까지 ‘무엇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고 또 말해서도 안 되는’ 일자에 선자체 개념을 부여해 ‘무엇인가를 의미할 수 있고 말할 수도 있는’ 것으로 만들었을까요? (633)
고대 사람들은 신을 선과 악, 빛과 어둠, 온기와 냉기, 행운과 불운 같은 이원적 힘의 근거로 인식했습니다. 이때 플라톤이 나선 겁니다. 그는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신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 본질은 선이라고 주장했지요. 그렇게 사람들을 위로한 것입니다. 이런 구세적 성격은 사도 바울의 ‘승리 찬가’로 불리는 기독교의 ‘섭리사상’과 연결되어 적어도 19세기까지는 서양문명을 이끌었습니다. 플라톤의 철학이 ‘영원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 있지요. 한마디로 신은 악한 게 아니라 선하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마음편히 살다가 죽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바로 이것이 플라톤이 서양 사람들에게 준 위대한 선물입니다. 만물의 궁극적 근거가 선이라면 인간은 당연히 선하게 살아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고대인들에게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지요. 플라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선자체를 보고 그것을 표본으로 삼아”살아야 한다고 교훈했습니다. 이같은 플라톤 사상을 기반으로 세계와 인간의 삶에 본래적으로 선한 신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스토아 철학의 자연법 사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이후 로마에 들어가 로마법의 기초가 되었고,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깊이 침투해 기독교 윤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요. (635)
플라톤은 철학체계에서는 단지 헛된 것인 ‘지상의 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래서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를 선자체로 정의함르써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고 선한 삶을 끌어내는 데 전념했던 겁니다. 플라톤 철학의 진짜목적은 ‘천상세계로의 초월’이 아니라 ‘지상세계에서의 승화’던 것이지요. 플라톤은 자신의 사유를 ‘일자’라는 더없이 높고 신비스러운 영역으로 끌어올렸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자를 ‘선자체’라고 정의함으로써 곧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의 영역으로 발길을 되돌린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역사상 그 어떠 철학자도 따를 수 없는 플라톤의 위대한 면모입니다. 그는 논리적 오류를 무릅쓰면서까지 일자에 선자체 개념을 부여해 2400년간 이어진 서양문명 전반에 각별히 건전한 현세적 미덕을 개척하는 형식과 용어아 논법을 제공했지요. (637)
“플라톤 철학의 최고점은 신학이며” “그 둘은 하나다”라는 평을 들을 만큼 플라톤은 수많은 종교적 교설의 근간이 되는이론을 설파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신비주의에는발을 들여놓지 않았지요. 그것이 “기하학을 모르는 자, 여기 들어오지 말라!”라고 말하던 플라톤의 철학적 기준이었고 그를 종교인이 아니라 철학자로 남게 하는 버팀목이었지요. (638)
플로티노스의 일자
플라톤이 깊으 종교적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였다면 플로티노스는 깊은 철학적 통찰력을 지닌 종교인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원칙상 인식할 수도 언급할 수도 없는 일자를 ‘선자체’로 바꿈으로써 일자에 관한 많은소중한 것을 ‘우회적’으로 말했지요. 그러나 플로티노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자’에 대해 직접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해서 ‘일자 형이상학’이라는 신비로운 길을 닦았습니다. 일자의 가장 두드러진 본질은 ‘첫째’가 아니라 ‘절대적 초월’이지요. 일자의 ‘일’은 기수의 일도 아니고 서수의 첫째도 아니지요. 오직 유일하다는 의미의 ‘일’이지. 이후 서양문명에서 말하는 일자는 곧 유질자입니다. 요컨대 일자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의 바닥에 깔리는 심연이 되며, 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한정할 수 있는 개별적인 것들이 그 안에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포괄자예요. 기독교의 신이 갖는 유일성도 바로 이렇습니다. 플로티노스는 “일자는 모든 사고와 존재를 넘어서며, 말로 표현할 수 없고 파악할 수도 없다”라고 표현했어요. 일자는 절대적 초월자, 초존재자지요. “일자에는 개념도 없고 지식도 없다. 그래서 신은 정신의 저편에 있다고 말한다”라는 플로티노스의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640)
주목할 것은 일자에 관한 이런 사유가 기독교 사상 안에서 삼위일체 신의 제일위인 성부로 발전했다는 사실입니다. 플로티노스가 신적 존재로 구분한 일자. 정신.영혼이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지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모든 것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상정되었다라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642)
비록 플로티노스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매우 유사한 사변적 가르침들을 남겼다 해도 그 둘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무엔 오리게네스 같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그 둘을 가차 없이 결합해 삼위일체론을 만들었을 때, 그 안에는 돌이키기 어려운 분쟁의 위험이 잠재되어 있었지요. 플로티노스의 일자에서는 정신과 영혼이 순차적으로 유출되었고 이것이 각각으로 분리된 체 하나의 자립체로 존재하기는 해도 어쨌든 일자에 종속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은 태초부터 동시에 하나로 존재하며 분리되지도 않고 서로 동등하지요. 알고보면 바로 이 차이점을 국복하려는 노력이 초기 기독교사에서 가장 큰 논쟁인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입니다. 삼위일체 논쟁은 318년 아리우스 논쟁에서 비롯되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마감되었습니다. 이 논쟁을 통해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 철학을 마침내 극복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때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일자가 가진 속성들과는 전혀 다른 유일자로서 고유한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났지요. (644)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신구약성서의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성육신이다”라는 후스토 곤잘레스의 말이 대변하듯이,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에 왔다는 선포를 기본으로 한 종교지요. 따라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그들 앞에서 나타난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구약성서에서 자신을 계시한 히브리인들의 신도 계속해서 신앙해야 했지요. 그들 배두분이 히브리인이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보다 결정적 이유는 예수가 구약성서의 신을 배척하기는커녕 ‘아버지’라 부르고 자기 스스로를 ‘아들’이라고 낮추며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오순절에 예수 추종자들에게 강림하고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통해 직접 체험한 성령도 신으로 믿어야만 했지요.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 한마디로 예수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라고 교훈했습니다. 그 결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알게 모르게 ‘세 분 하나님’을 모셔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약성서의 신이 자신을 유일자로 계시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기독교인들이 당면한 문제의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어떻게 셋이 아니고 하나일 수 있느냐였지요. 이것이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이라는 매우 특이하고도 난해한 교리를 서둘러 만들어야 했던 이유입니다.(647)
사로 교부들은 자신들의 스승이거나 동역자 사도들이 그랬듯이 삼위일체 또는 이위일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물론 이때는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가 아직 나오기 전이었으므로 그들은 대개 성자 예수를 성부와 동일시하는 표현으로 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나 이위일체를 교훈했지요. 혼란의 본질은 아버지와 아들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라고 주장해도 안 되고, ‘분리되는 둘’이라고 주장해서도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짐작컨대 아무리 대담한 기독교인일지라도 이교도 앞에서 자신들의 신이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라는 배리를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650)
용어가 사유를 가능하게 하다
내 생각에 고대 기독교 신학계가 처한 이 당혹스러운 정황은 20세기 초 양자물리학계가 당면했던 난처한 상황과 매우 흡사합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이론 이전에는 빛은 증명되고 공인된 파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빛이 고속으로 이동하는 에너지다발, 곧 입자라는 것을 실험을 통해 증명하자 물리학계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어떻게 빛은 파동이면서 입자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지요. 이른바 파동-입자 이원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독일의 젊은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해결합니다. 가는 잠세태라는 용어를 빌려와 일어나려는 경향 으로 규정할 수 있는 가능태 일뿐이어서, 실험자의 관찰에 의해 비로서 입자 또는 파동으로 현실화(확정)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수학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인정되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잠세태라는 적절한 용어를 개발함으로써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는 드러나지만 우리의 언어와 사고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미시세계의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학문에서 ‘전문용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해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건축물의 벽돌처럼 용어는 사유의 기본 단위이기 때문에 용어의 개발이 사유를가능하게 하는 것이지요.!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전까지는 누구도 하지 못한 발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있는 전문용어를 개발하여 당시 기독교 신학계가 당면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물꼬를 텄습니다. (653)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들
북아프리카는 수세기 동안 반달족이 419년 침략하기 전까지 서방 기독교 사상의 중심지였습니다.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북동쪽으로는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인 에게 해가 놓여 있어 해안 도시들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그리스 철학이 퍼졌지요. 동쪽으로는 팔레스타인과 인접해 있어 기독교가 자연스레 흘러들어 왔습니다. 줄곧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정치적 수도인 로마와는 거리를 두고 있어서 독자적 문화를 형성할 자유가 있었지요. “라틴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테르툴리아누스나 기독교 신학사상 가장 위해단 인물인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인이 아닌 북아프리카인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청년시절 그지역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변호사가 될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격렬한 논쟁과 법정 송사를 즐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초기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성장을 도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안디옥학파를 중심으로 한 초기 동방 기독교 사상가들이 대부분 회심한 사변적 철학자인 데 반해, 아프리카 학파 사상가들은 대개 법률가가 수사학자인 건 그 때문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위격’과 ‘본질’이라는 법학 전문용어를 끌여들어 ‘삼위일체’라는 용어와 이론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그때부터 “신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사유와 언급이 기독교 신학 안에서 비로소 가능해졌습니다. 이이론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까지 적어도 150년 동안 폭풍우 같은 혼란에 휩싸여 우여곡절을 겪지요. (658)
위격이란 라틴어로는 페르소나인데 한 개인의 법률상 자격이나 지위를 말하지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가 사용한 ‘페르소나’는 바깥으로 나타나는 신의 지위, 곧 성부.성자.성령을 의미합니다. 테르툴리아수는 그리스어 ‘우시아’의 라틴어 번역인 ‘수브스탄티아’를 사용했는데, 당시 법률용어로 이 말은 한 개인이 갖는 ‘소유권’을 뜻했지요. 로마 제국에서는 아버의 권한을 아들들이 공동 소유했지요. 그러므로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수브스탄티아’라는 용어는 성부가 성자,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소유하는 신적 권능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공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은 신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 셋(성부.성자.성령)이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권는(사고,의지,행동)에서는 하나’라는 뜻이지요. 신은 세계에서 창조에서 종말까지 오직 자신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역사안에서 순차적으로 진행한다는, 교부 이레네우스의 ‘고속경륜’ 개념이 삼위일체론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인 신이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자신 안의 세 위격을 단계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 마치 태양에서 빛이 나오듯이 창조의 순간 둘째 위격인 성자가 생겨나고, 이어 셋째 위격인 성령이 발출되었다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새로운 전문용어를 도입함으로써 삼위일체 산에 대한 사유와 언급이 비로소 가능하도록 만들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여전히 애매모호함과 공허함을 남겼지요.(660)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오리게네스는 참으로 불꽃같은 사람이었고 진실로 격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신학자이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운영하는 신앙입문 학교 ‘카테케시스’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는 평생 동안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담그고 살았지요. 로마인들은 한때 자신들이 문명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의도적 잔혹 행위나 장기간에 걸친 고문을 금지하는 형법을 보유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달랐지요. 놀랍게도 당시의 기독교 순교자들 대부분이 ‘신앙을 포기한다’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상상을 초월하는 그 고통을 면할수 있었는데도 가냘픈 초녀들조차 끝내 비굴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므로 육체가 파괴될 때 비로소 영혼도 해방된다는 당시 교부들의 신플라톤주의적 가르침을 굳게 믿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순교에 대한 소망이 소년.소녀들에게도 마치 전염이라도 되듯 확산되었습니다. (663)
오리게네스는 스승 클레멘스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자 203년부터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험을 무릅쓰며 신앙입문학교에서 성경과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엄밀히 말해 그는 니케아 이전 기독교인들을 통틀어 가장 박식하고 가장 근면하고 가장 문화 수준이 높은 학자였지요. 너무 강하게 플라톤주의적 주장을 펼친 탓에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이단으로 단죄받기도 했습니만, 오리게네스는 아우구스티누스, 루터와 함께 기독교 사상사에 가장 위대한 신학적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 평가받고는 하지요.(666)
알렉산드리스는 자연히 세계 각국에서 여러 종류의 학문, 예술, 종교가 이곳으로 모였고 이것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색깔의 새로운 학문과 종교를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여기서 젊고 새로운 피인 기독교가 늙은 거인의 그리스 철학과 만났지요. 그런데도 이 만남이 ‘젊고도 활력 있는 거인’을 탄생시켜 서양문명에 기독교 사상이라는 새로운 대지를 개척한 것입니다. 그 일을 주도적으로 실행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선두에 알락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가 서 있었지요. (668)
플라톤주의 사상들의 공통 특징은 플라톤 사상을 바탕으로 하되, 당대 사람들의 종교적 관삼과 요구들을 대폭 수용한 탓에 신비주의 경향을 띤다는 것이지요. 고대가 저물어 갈 무렵 그리스 철학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든 종교화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이상의 힘’으로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지요. 그 결과 철학자들 대부분이 신비주의로 기울어 기존의 철학과 신비주의를 혼합한 종교 형태의 사상을 만들었는데, 신피타고라스주의, 중기/후기 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등이 대표적 예이지요.(669)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알비누스는 신을 제일신, 정신, 영혼으로 구분했지요. 알비누스의 제일신은 자기 자신은 전혀 변화하지 않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을 직접 생성하거나 그것에 직접 작용하지 않습니다. 제일신은 오직 자기로부터 산출된 ‘정신’을 퉁해 사물들을 생성하고 ‘영혼’을 통해 사물들에 작용하지요. 알비누스의 사상은 플로티노스의 일자 형이상학과 매우 흡사합니다. 암모니오스 사카스의 두 걸출한 제자인 플로티노스와 오리게네스는 알비누스가 설파한 것과 같은 내용의 중기플라톤주의를 같은 스승에게서 약 20년의 시차를 두고 교육받았지요. 오리게네스는 그것을 삼위일체론의 구성 틀로 사용했고, 플로티노스는 일자 형이상학을 구축하는 재료로 썼지요. 바로 이것이 신학과 철학에 각각 거대한 발자국을 남긴 두 사람이 서로 전혀 교류가 없었는데도 거의 유사한 내용의 사유를 하게 된 까닭압니다. (672)
오리게네스가 <<원리론>>에서 한 일은, 테르툴리아누스 이후 당시 기독교 사회에 널리 퍼졌는데도 내용은 부실했던 삼위일체론을 중기플라톤주의 사상으로 풍성하게 채우는 한편 체계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는 일반 신자들은 물론이고 신학자들까지 ‘성부’를 ‘삼위일체 신의 제일위’로 인식하기보다는 ‘만유의 창조주인 야훼’로 인식했다는 점이지요. 기독교 초기이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플라톤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삼위일체론을 구축하려던 신학자들에게는 바로 그것이 무척 넘기 어려운 장벽이었지요. (673)
플라톤주의 교설에 따르면 그들이 ‘정신(nous)’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존재, 곧 창조주는 ‘최고의 신’이 아니고 그로부터 나온 제2원리지요. 그런데 기독교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신 야훼를 ‘창조주’일 뿐만이 아니라 ‘최고의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인들과 플라톤주의자들 사이에 놓인, 메울 수 없는 또 하나의 간격이었지요. 기독교인들로서는 자기 종교의 ‘최고 신’이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해 ‘제2원리’로 평가 절하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절대적 초월자이자 불변인 일자가 ‘직접’ 창조라는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요. (674)
이 문제를 기독교 용어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기독교 교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구분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동등해야 하는데 플라톤주의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차등적이며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극복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은 처음부터 격렬한 논쟁으로 파급된 것입니다. 이 문제에 오리게네스는 두가지 상반되는 입장을 동시에 취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동등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모두 취한 것이지요. (675)
오리게네스에 의하면, 신은 ‘존재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의 근원이고 로고스는 신의 ‘내적 언어’로서 모든 존재의 창조 원리입니다. 로고스는 신과 함께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합니다. 그는 이 교설로 플라톤주의의 유출설은 거부되고 신은 영원불변한 세 위격이라는 ‘내재적 삼위일체론’이 주장되었습니다. 신(로고스 또는 아버지)과 아들이 한 실체라는 동등성 등식이 도출되어 이것이 후일 서방 가톨릭교회에 속하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주장이 되었지요. 한편 오리게네스는 아버지아 아들을 구분해, 아버지만 그 무엇도 의존하지 않는 ‘자존의 신’이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이자 얼굴이며 본질이지만 아버지 자신은 아니며, 오직 구원 사역을 위해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경륜적 삼위일체론이 되살아난 것이지요. 중기 혹은 신플라톤주의적 종속설은 창조주를 제일신과 세계 사이에 (아들을 아버지와와 세계 사이에) 있는 ‘중간자’로 파악함으로써 한때 기독교 교려에서 신과 세상과의 ‘화목제’로서의 그리스도 역활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676)
오리게네스 자신은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동일하면서 또 어떻게 종속적인가를 설명하기보다는 두 가지 입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 했어요. 그는 상황에 따라 알맞은 용어를 사용하면서 “피조물들에게 성부는 존재를, 성자른 합리성을, 성령은 성결함을 부여한다라는 식으로 삼위일체를 교훈했습니다. 이처럼 계시와 철학, 기독교와 플라톤주의에 각각 한 발씩 딛고 양쪽을 절충한 것이 오리게세스 신학의 두드럽진 장점이었습니다. 기독교적인 동시에 플라톤주의적이던 오리게세스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오리게세니 우파’와 ‘오리게네스 좌파’라고 부르는 그 후계자들에 의해 삼위일체론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불쏘시개가 됩니다.(677)
삼위일체 논쟁
교회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삼위일체 논쟁은 삼위일체설을 놓고 부딪친, 알렌산드리아 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오리게네스 우파와 안디옥 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오리게네스 좌파 간의 세력 다툼이었습니다. 오리게네스 좌파의 대표인 아리우스는 일자에서 정신이 나왔다는 플로톤주의의 이론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아들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그 자신은 아버지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므로 피조물이고, 엄격한 의미에서는 신이 아니라고도 주장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는 반인반신의 존재이거나 양자그리스도론자들이 주장하던 존재라는 것이었지요. 바로 이 점이 나중에 그가 사모사타의 바울주의자로 공격받게 된 이유입니다. 이에 반대하는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와 리비아 종교회의>를 열고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정죄하고 면직했지요. 이렇게 벌어진 논쟁은 차츰 교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고 갔습니다.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서 기독교를 승인한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개입했습니다. (679)
아타나시우스는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 용기, 왕성한 활동력으로 신앙과 교회를 위해 싸워 “위대한 계몽자”, “하나님의 모퉁잇돌”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사람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한마디의 삼단논법으로 요약할 수 있지요. “아들은 구세주고,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곧 신이다” 요컨데 아들이 신이 아니고야 어떻게 인간과 세계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구원이 새로운 창조라고 해도 그것은 오직 창조주 한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구원이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 그것은 오직 불멸자나 영원자인 하나님 한 분만이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구세주란 당연히 신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신성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신은 우리가 신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되었다”는 겁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이 같은 주장이 ‘신의 세속화를 통한 인간의 신성화’라는 동방정교 신학의 중추가 되었지요.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 ! 바로 이것이 아타나시우스가 ‘사벨리우스주의자(또는 성부수난론자)’ 로 몰리면서까지 아버지와 아들의 동질성을 강조한 이유였고, 바로 이것이 그가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사모사타의 바울주의자(양자그리스도론자)로 몰면서까지 반대했던 까닭이었습니다. (683)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말대로 아버지와 아들이 유사할 뿐 동등한 자가 아니라면, 따리서 아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이 아니고 단지 아버지와 세계 사이의 중간자라면, 기독교는 다신교이며 교회는 다른 다신론을 정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생각이었지요. 세계의 창조자로서 지금도 피조물의 세계에 부단히 직접 관계하므로 신과 세계 사이의 중간자는 필요 없다고도 여겼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고, 아들도 신이며, 기독교는 유일신교라는 것이지요. (684)
니케아 공의회에서 우여곡절 끝에 아리우스주의가 배격되고 반 아리우스주의가 채택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작성된 새로운 신앙고백이 바로 ‘니케아 신조’이지요. 니케아 신조의 핵심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 곧 일자=창조주라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동등성 등식이었습니다. 이로서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예수의 신성을 명백히 인정하는 것이었고, 사상사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학이 그리스 철학을 비로소 극복한 계기가 되었지요. 신학적으로 니케아 신조가 확정된 후 이에 반발하는 세력과 교회가 늘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이미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지요. 이렇듯 유례없는 혼란 가운데 동방교회에서는 가카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가, 서방교회에서는 기독교 사상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아우구스티누스가 나왔습니다. (688)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
기독교신학에서는 삼위일체론만큰 기본이 되는 교리도 해석하기 어려운 교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대부분의 문제는 언제나 배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일 수밖에 없는 종교적 사유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어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문학에서든 미술에서든 결국 문제는 어떻게 하면 성부.성자.성령이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느냐였지요. 니케아 신조 및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기반이 된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 신학의 약점도 ‘삼위’가 가진 다양상과 ‘일체’가 가진 통일성을 동시에 설명해 줄 확정된 용어가 결여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년에 아타나시우는 혼란을 정리할 전문용어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했지만 끝내 그 일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일은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에게로 넘어갔지요. 그들의 업적은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기존 용어들에서 애매함을 제거함으로써 삼위일체 개념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지요. 단지 이일만으로도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가 결코 어색하지 않습니다. 당시 신학계에서는 용어와 개념의 혼란에서 오는 폐단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했기 때문이지요. (696)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청소
세 교부가 과감하게 나서서 마치 현대철학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은 언어가 우리의 지성을 사로잡는 것에 맞서는 투쟁”이라고 외치며 수행한 것과 똑같은 일을 고대신학에서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한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은 풍성한 의미를 창조해야 하는 문학에는 분명도움이 되지요. 그러나 정확한 개념을 구사해야 하는 학문에서는 자주 방해가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위격이라는 말로 사용한 ‘히포스타시스’와 본질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우시아’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이 단어들은 적어도 수백년 동아 여러 철학자와 그 학파들이 전문영어로 사용하면서 제각각 다른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697)
플라톤에게는 이데아만 실제로 있는 것이고 모든 존재물은 단지 이데아의 분여물, 곧 모상일 뿐입니다. ‘사과의 이데아’가 실체고,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사과는 그 모상일뿐이니다. 플라톤 철학의 이 독특한 사변 탓에 우시아는 플라톤의 관점에서는 ‘실체’이지만, 우리의 관점에서는 오직 개념을 통해 파악되는 존재물의가지적 실체, 곧 ‘본질’일 뿐이지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시아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완전하고 불변하며 단일한 실체로서 개별적 사물을 초월해서 존재하다는 데 반대했습니다. 그에게 우시아는 현실세계에 있는 개개의 사안 안에 존재함으로써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형상, 곧 에이도스지요. 아시스토텔레스에게 우시아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가시적실체’를 의미하지요. 이런 이유로 그리스어 ‘우시아’는 본래 ‘실체’를 의미했지만, 4세기 당시에는 플라톤이 말하는 가지적 실체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가시적 실체, 곧 ‘본질’과 ‘실체’라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었습니다. 우시아는 때로는 플라톤적 의미로 때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로 폭넓게 혼용되었지요. (699)
히포스타시스는 어땠을 까요? 이용은 일상적으로는 ‘걸으로 드러나 배후에 있는 실체’를 나타내는 말이었기 때문에 ‘계획’,’의도’,’기본 개념’등의 의미로 쓰였지요. 그러다가 스토아 철학에 와서 처음으로 철학적 의미를 띠게 되는데요. ‘우시사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 또는 ‘우시아에 의해서 실체를 얻는 것’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히포스타시스는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는 우시아’인 것입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히포스타시스를 ‘일자’로부터 유출되는 ‘정신’과 ‘영혼’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용어에서 ‘가시적 실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가 자연스레 제거되고,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개별적 사물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궁극적 존재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히포스타시스는 우시아에서 유출되었지만 우시아와 마찬가지로 사물의 원인이되 사물을 초월해 존재하는 ‘가지적 실체’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물들의 궁극적 ‘본질’을 뜻했습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를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가시적 실제’와 구분하기 위해 흔히 ‘본체’라고 표기하지요. 결국 4세기 당시에는 그리스어 ‘히포스타시스’ 역시 ‘실체’와 ‘본질’, 다시말해 가시적 실체와 가지전 실체, 이라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었고, 어떤 때는 스토아 철학적 의미로 어떤 때는 신플라톤주의적 의미로 자주 혼용되었습니다. 극심한 언어적 혼란 때문에 당시 동방교회 사람들에게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삼위일체정식이어떤 형태의 그리스어로 표현되더라도 삼신론과 단일신론 사이에서 혼란만 가중시킬뿐 그 의미는 여전히 분명치 않았던 겁니다. 카타도키아의 세 교부가 바로 이러한 언어적 혼란을 정리했습니다. 그들의 원칙은 삼위일체를 단호하게 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703)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는, 그들이 ‘세 본체로 존재하는 한 본질’이라는 새로운 정식을 구축하는 데서는 오리게네스 좌파와 마찬가지로 분명 신플라톤주의를 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정식을 해석하는 데서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주장도 무시하지 않고 ‘신적 본질의 통일성’을 부단히 강조했지요. 그들은 하나의 공통된 신적 본질이 다른 세 가지 고유한 존재양식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지만, 삼위는 ‘나뉨 속에서도 연합해” 있기 때문에 오직 서로의 관계에 의해서만 구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니케아 신조’를 다시 한번 확인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정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핵심이 되었지요. (705)
서방교회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바로 이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어를 몰랐기 때문에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가 삼위일체론에 사용한 용어들과 그 내용을 깊이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플라톤주의에는 누구보다 정통했기 때문에 “나뉨속에서도 연합해”있다는 ‘신의 상호내주’에 관한 세 교부의 중심사상에 독립적으로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명료하고 심오하게 설명하여 이른바 ‘관계설’이라 불리는 삼위일체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점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관계설을 통해 단순히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현세적 의미, 곧 신의 삼위일체가 우리에게 어떤 상징과 의미를 갖는지 해석해 냈다는 점입니다. (707)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아우우구스티누스가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정식에서 위격을 나타낸 용어 페르소나와 본질을 나타낸 용어 수브스탄티아가 모두 신에게는 적합하지 않음을 지적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오직 ‘존재’라는 신의 본질만을 나타내는 표현인 ‘에센티아’가 더 적합하다고 주장해지요. 또한 위격을 나타내는 라틴어 ‘페르소나’ 역시 신에게는 적합하지 않은데, 이 용어는 일상에서 보통 개체를 뜻하기 때문에 성부.성자.성령의본질에서도 상이한 존재인것처럼 만들어 버린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같은 지적은 ‘삼위의 통일성’을 다른 누구보다도 ‘유난히’ 강조하는 그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그는 또한 ‘삼위의 동등성’ 또한 ‘유별나게’ 강조했습니다. 삼위는 오직 ‘관계에서만’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에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나뉘지만 연합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종위의 앞뒤면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분리할 수 없이’ 하나이고 누가 먼저 존재하고 누가 나중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관계적으로만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그 둘은 마치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아버지에 대해 아들로, 아들에 대해 아버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712)
이미 존재하고 있는 존재는 또다시 낳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고 할 바로 그때까지는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을다는 것이 옳다. 간단하지만 논리적이고 타당한 답변입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노스의 대답은 마땅히 “아버지와 아들은 태초부터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중 하나를 아버지라고 할때 다른 하나는 아들이 된다. 따라서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는 건 옳지 않다”라는 것이겠지요.
삼위일체가 진정의미하는 것
그는 삼위일체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사고되거나 표현되었을 때는 아무리 뛰어난 방식으로 실행되더라도 삼위가 분리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존재의 바다’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신을 바다에 비유한 표현은 4세기의 동방정교 신학자인 나지 난제누스의 그레고리우스가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라고 쓴 글에서 처음 발견되고 서방교회에는 8세기야 다마스쿠스의 유한네스에 의해 알려지기 때문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으로서는 어떤 수를써도 삼위일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 없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밝힐 수 없는 이유를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과 언어의 한계에서 발견했지요. 그는 우리가 육체의 한계와 이에 따른 이성의 한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에야 이 진리를 완전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여 그것을 인간의 한계로 조용히 받아들였지요. 그보다느 삼위일체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 또는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을 훨씬 흥미롭고 위해안 일로 자신의 관심을 돌렸습니다.(717)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삼위일체적 본성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 세계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삼위일체 흔적이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몰두했습니다. 성부.성자.성령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이 곧 신의 본질인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고 그러한 사랑을 본받으라는 계명을 받았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그는 성령을 사랑, 선물, 친교로 파악했고, 우리도 성령에 의해 서로 간의 친교른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신과도 친교를 이룰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기독교는 진리가 단지 교훈으로 선포된 종교가 아니라 성육신을 통해 행위로 실천된 종교입니다. 진리는 말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 기독교를 통해 서양문명 안에 잠재되어 부단히 내려오는 바로 이 고귀한 사유를 감안할 때, 우리가 삼위일체의 내용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지침이 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720)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독일튀빙겐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몰트만은 신의 단일한 통일성을 주장하는 서방신학 전통의 일신론적 삼위일체론에 단호히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다원적 삼위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내세웠지요. 이 주장을 동방신학의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에서 가져왔습니다. 페리코레시스란 상호내주와 상호침투라는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 용어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침투해 들어가 있다’는 뜻이지요.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 성부.성자.성령이 가진 통일성은 동일한 것이 모여 있는 ‘단일성’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해 들어가 있는 ‘공통체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몰트만은 “신적위격들은 그들의 영원한 사랑 덕분에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 안에서 참으로 친밀하게 존재함으로써, 그들은 고유하고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통일성 안에서 자신들을 형성한다” 사랑이 바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지요. 삼위를 하나로 묶는 이 사랑은 단순히 자신과 동일한 것만 받아들이는 ‘동종사랑’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서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까지 받아들이고 포괄하는 ‘이종사랑’이라는 겁니다. 에로스란 대상이 가진 무엇(참됨,선함,아름다움,부귀…)때문에 그 대상과 합일하여 ‘동일한하나’가되고자 하는 욕구지요. (때문에 하는 사람, 인간적 사랑). 여기에는 ‘동인한 하나’가 되기 위한 강제가 크던 적든 들어있게 마련인데 모트만이 말하는 ‘동종사랑’입니다. 하지만 아가페는 서로 이질적인데도 불구하고 ‘통일된 하나됨’을 이루려는 욕구입니다. 흔히 …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람 또는 ‘신적사랑’이라고 하지요. 여기에는 서로 다른 것이 어울려 통일을 이루는 조화만 있을 뿐 합일을 위한 강제는 그 어떤 것도 없는데, 몰트만이 말하는 ‘이종사낭’이바로 이런 겁니다. 요컨데 아가페는 마치 여러 가지 악기가 서로 다른 자신들의 역할을 오히려 굳게 지킴으로써 다성성을 가진 하나의 음악을 이루어 내는 교향악처럼 서로 다른 개체들이 모여 서로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함으로써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공동체를 마침내 이루어 내는 사랑이지요. (726)
회화는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연합되지만 혼합되지 않는 삼위일체의 본질을 언어나 회화로 형성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음악에는 그러한 삼위일체의 특성을 어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요소가 존재하지요. 17세기말 유럽에서 완성되어 오늘날 서양문명에 널리 퍼져 있는 조성음악인데 이 음악의 두드러진 특성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음이 동시에 울려 화성을 이룬다는 겁니다. 화성을 이루는 각 음들은 상호배타적으로 분리되지도 않지만, 상호융합적으로 혼합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화음이 만들어지지요. 교양악에서는 악기들이 각자 자기 소리를 냄으로써 또는 4부 합창에서 각 성부가 각각의 역활을 유지함으로써, 단성음악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다성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몰트만은 이러한 이종사랑을 통해서만 신의 사랑이 삼위뿐 아니라 그 피조물에까지 무한히 확대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흘러넘치는 이종사랑 덕분에 성부.성자.성령은 자신을 넘어서서 창조와 화해와 구속 안에서 유한하고 모순된 도덕적 피조물인 타자를 위해 자신을 개방하신다. 그 결과 자신의 영원한 삶안에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공간을 제한해서 그들이 자신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이론적 근거를 내세워 인간은 신적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내주, 상호침투적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완전 평등한 사귐과 교제를 실현하도록 부름받았고, 인간 공동체는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한 그것(성령)을 통해 그분들은 우리가 우리들 서로 간의 친교를 세우고, 그분들과의 친교도 세우기를 원하셨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연상케 하는 주장이지요. “하나님은 세 인격이 상호내주를 통해 하나의 공공동간을 형성한것처럼, 피조물 차원의 공동체 역시 상호 자기발전을 위한 사회적 공간을 형성해야 한다. 피조물들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데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이 자유,평등,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는 비위계적.비지배적 사회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기독교적 사회윤리는 삼위일체적 사고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729)
이러 의미에서 가정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는 인간 공동체의 표본입니다.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적 가정에 위계적 질배와 특권적 강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럼에도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상호침투적으로 공유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수긍 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이것 말고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공동체를 상상하기는 쉽지가 않아요. (730)
삼위일체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몰트만의 해석을 통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이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일자의 유일성에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단일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성이 단일성으로, 단일성이 삼위성으로 축소되는 일 없이 결합한 통일성입니다. 이 통일성 안에는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자유와 평등과 사랑으로 이룩되는 인간 공동체의 원형이 담겼지요. 성격상 무규성과 무제한성에서 오는 일자의 ‘획일적’ 포괄성과 통일성을 훌쩍 뛰어넘는 것으로 , 삼위일체 신의 이종사랑에서 나오는 ‘공동체적’ 포괄성과 통일성이지요. 전자가 수동적.소극적 성경을 가졌다면 후자는 능동적. 적극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라는 말인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지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일성이 배타성의 전제이자 결과이듯, 다양성은 통실성의 전제이자 결과입니다. “신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신의 이름으로’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732)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구약의 신이냐, ‘신약의 신’이냐
신이 자기 몫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택했다는 이 선포는 기독교 신학이 시작된 초기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특수주의와 “유일하신 하나님” 이라는 보편주의 사이에 심각한 신학적 긴장을 가져왔지요.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매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신, 즉 ‘전쟁에 능하신 야훼’,’보복과 질투의 신 야훼’, ‘이스라엘을 편애하는 야훼’입니다. 신약성서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교훈한 사랑의 하나님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지요. 2세기에 살았던 마르시온은 야훼의 배타성과 폭력성을 폭로하며 그것을 비난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가 싸워야 했던 각종 이단 가운데 마르시온처럼 위험한 사람은 없었을 정도지요.(736)
마르시온은 사변적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종교개혁자였지요. 그는 자신이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하지 않고, 혼탁한 기독교 메세지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참된 정경해석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랬기에 대중에게 더 열광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을 명백히 구분 지어 대립시켰지요.구약의 신을 ‘율법의 신’이라며 거부한 채 신약의 신만을 ‘복음의 신’으로서 받아들였지요. (737)
초기 기독교 교리를 세운 교부들이 마르시온과 똑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는데도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구약의 신 야훼를 기독교 안에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안에 있는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폭력적인 요소는 모두 걷어 냈지요. 이일을 누가 했을까요? 나중에 천천히 긴세월을 두고 기독교 신학자들이 해 낸 일일까요?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건 예수와 사도 바울이 직접 나서서 그 당시에 이미 한 일이지요.(739)
신플라톤주의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서 기독교 교리를 정립하던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성서에서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라는 예수의 교훈을 보았을 때 그 ‘온전하심’에 해당하는 것으로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플라톤의 ‘선자체’ 또는 플로티노스의 ‘일자’가 가진 선성과 포괄성 그리고 일치와 조화가 아니었을까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요.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며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신앙적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741)
오늘날에도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이교도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달화하는 사람들이 그리하듯이, 신앙을 자신들의 세속적 탐욕에 이용하는 불순한 세력이 선동해서 반그리스도적이고 반신앙적인 만행을 저질러 왔습니다. 십자군을 일으키며 “신의 뜻이시다”라는 구호로 민중을 선동했던 중세 성직자들이 그랬듯이, 신을 왜곡하여 빌미로 삼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쉬운 선동 방법이지만 동시에 가장 나쁜 방법이기도 하지요. (742)
유일신이 왜 질투하나
모세의 선포(신명기6:4~5)가 후일 기독교 사상가들이 생각한 어떤 형이상학적 원리를 설정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모세는 다만 계시를 통해 신의 유일성을 받아들였고 자기 백성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예배대상으로삼아야 할 것인가를 선포했을 뿐이지요. 그럼에도 이는 후일 그리스 철학을 통해 유일신 사상을 기독교 교리로정립하려 한 기독교 사상가들의 작업에 초석이 되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모세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은 그 후에도 오랫돈안 자신들의 신 야훼를 다신론적으로 파악했다는 점입니다. 이점은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신 이라는 하나의 특정 맥락에서 이야기된것으로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유일신에 대한 다신론적 표현은 신이 실제로 여럿이어서가 아니라 고대 히브리인들이 신을 여럿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745)
고대 히브리인들은 야훼를 여러 부족신 중하나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 차축시대에 와서야 그들에게 ‘보편적 정의’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보편적 신’개념도 함께 생겨나 야훼를 유일신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역사 흐름에 따라 야훼가 감정이 격한 절대적 폭군에서, 스스로 세운 계야에 충실한 입헌군주를 거쳐, 사랑이 넘치는 민주적 지도자의 모습으로 변모해 갰던 것은 신이 그렇게 변해서가 아니라 히브리인들이 신을 그런식으로 경험했다는 말일 뿐이지요. (748)
인간이 성숙해 감에 따라 신의 나라도 성숙하고, 그래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신의 법칙이라는 것이지요. 인간 정신과 문화의 진보에 따라 신 관넘이 함께 진보하는 과정에서 신이 모세에게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났다는 게 기독교의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자면, ‘다른 신’이 아니고 단지 히브리인들에 의해 경험된 ‘다른 신’일 뿐이라는 이야기지요. (751)
존재이자 창조주인 신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야훼의 배타성, 폭력성, 질투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신의 ‘후회’를 논하는 자리에서 같은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우리의 연약함은 그분의 숭고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방식대로 그를 묘사한 것은 우리의 능력 수준에 맞추어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려 하신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런 적응 방식은 우리에게, 그분이 계신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묘사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의 신을 포기하지 않고도 신약의 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754)
아브라함은 구원받았는가
유스티누스가 히브리인들의 성스러운 땅 세겜에서 그리스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 철학으로 기독교 교리를 세운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의 선구였으니까요.
그는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 이론과 요한복음의 가르침을 결합해 ‘선재적 그리스도록’이라는 아주 새로운 ‘기독적 로고스이론’을 개발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성육신에 대한 구절을 근거로 로고스가 만물을 창조한 ‘산출적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예수로 성육신하기 이전의 그리스도인 ‘선재적 그리스도’라고 주장했지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 처음 낳은 자” 또는 “신의 첫 소생”이라고 불렀는데요 이것은 일찍이 그가 공부한 플라톤학파에서는 일자에서 유출된 ‘정신(nous)’에 해당하는 개념입니다. 유스티누스는 우주의 이성인 “로고스의 씨앗”이 모든 사람에게 나뉘어 있어 인간이성이 되었다는 스토아 철학의 주장을 자신의 선재적 그리스도론에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즉 “진리의 씨앗”이 “온전한 로고스”인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분여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아브라함이나 소크라테스처럼 예수 이전에 살아서 역사적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몰랐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재적 그리스도’인 로고스를 알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말은 곧 예수와 기독교를 몰랐던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허락된다는 뜻이지요.(762)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등장하는 ‘나’는 당연히 ‘선재적 그리스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유스티누스의 생각이었습니다. 즉 그는 아브라함이나 소크라테스처럼 설사 ‘성육신한 로고스’인 역사적 예수와 그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선재적 그리스도’인 진리를 알았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그의 주장은 여러가지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유스티누스 같은 관점에서 보아야만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시대의 많은 인물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야,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신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라고 명령하는 포괄적 사랑을 가르친 마태복음의 교훈과 요한복음 14:6절의 가르침이 아무런 갈등없이 자연스레 연결됩니다.(765)
유스티누스는 한편으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은 다 악마에 불과하다면서 누구보다 강력하게 유일신론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선재적 그리스도론을 통해 예수와 복음을 몰랐던 유대교인들이나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구원이 허락된다는 포용성을 보였습니다. 오늘날 근본주의나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주목하고 본받아야 할 점이기도 하고요(769)
현대 신학에서는 가톨릭교회가 취하는 포용주의가 바로 그런 것이지요. 특히 20세기에 활동안 걸출한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유스티누스의 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디모데전서 2:4)라는 가르침에 따라 신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한 삶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 나간다면 신이 그들의 삶에 간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같은 주장을 바탕으로 가톨릭교회는 1965년에 개최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선포했지요.(769)
유신론은 극복되어야 하나
칼바르트와 함께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쌍벽을 이룬 파울 틸리히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이는 개념을 앞세워 “하나님에 관한 유신론적 관념을 초월하려는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이 안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으로 인한 배타성의 초월을 강력히 도전하는 내용이 있지요.(771)
“그는 전능하고 전지해서 나의 주체성을 빼앗아 버리고 만다. 나는 여기에 반항하고 그를 객체로 만들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실패로 항상 돌아가고 절망을 느끼게 된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은 건드릴 수 없는 폭군, 그 앞에서는 다른 존재자들이 다 부자유하고 주체성도 잃은 존재로 보이게 된다.”
틸리히는 객체로서의 이 신이 “무신론의 가장 깊은 뿌리’이자 신학적 유신론에 대한 반동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무신론의 근거이고, “실존주의적 절망과 널리 퍼져 있는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의 가장 깊은 뿌리”라고 지적했지요. 따라서 “유신론적 하나님을 초월해야만 존재에의 용기가 회의와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을 포섭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772)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한마디로 우리가 이미 언급한 ‘존재자체’를 말합니다. 이 궁극적 초월자, 궁극적 포괄자를 틸리히는 ‘존재자체’ 또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틸리히는 <<조직신학>>에서 이렇게 주장하지요. “플라톤에 의해 존재로서의 존재, 즉 존재자체의 개념은 모든 것 속에 내재하는 힘, 다시말하면 비존재에 저항하는 힘을 지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속에 있으며, 또 모른 것을 초월하는 존재의 힘, 바꿔 말하면 존재의 무한한 힘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론에 대한 첫걸음으로서 하나님과 존재의 힘을 굳이 동일시하지 않는 신학은 군주론적 유일신교다. 틸리히의 존재 조체는 아시트로텔레스의 에이도스(현존과 본질이 동일)와 달리 플라토의 ‘선자체’나 플로디노스의 ‘일자’가 그린 것처럼, 현존과 본질을 모드 초월합니다. (775)
당연한 말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플로티노스의 교설에 따르면, 일자로서의 신은 모든 사고와 모든 존재를 넘어서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떤 구별이나 차별도 없습니다. 주체(인식하는자)와 객체(인식되는자)의 분리는 일자에서 나온 정신으로부터 시작하지요. 플로티노스는 이 말을 “신은 정신의 저편에 있다”라고 표현했던 겁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존자자체, 곧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객체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라고 강조했지요. 이말은 결국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함르써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뜻입니다. 또 신과 인간의 만남이 있는 곳에서는 비록 감춰졌기는 해도 어디에나 존재하지요. 틸리히에 의하면 ‘하나님이상 가는 하나님’은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 경험되며, 허무성과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 안에 존재하며, 죄책과 정죄에 대한 불안안에서 작용하는”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삶의 무의미성과 죄책에 대한 불안을 짊어질 수 있는 용기, 곧 ‘존재에의 용기’를 우리에게 부여하지요.(776)
절대적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틸리히는 바로 이 같은 절대적 초월자이자 절대적 포괄자인 존제자체를 믿는 신앙을 ‘절대적 신앙’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 “존재자체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고 규정했지요. 한마디로 주체-객체의 관계가 없는 상태이며 일체의 구별과 차별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어서 “절대적 신앙 혹은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에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는 다른 여러 종류의 마음 상태와 나란히 나타나는 따위의 상태가 아니다.. 이것은 언제나 다른종류의 마음상태 안에, 그것과 함께, 또 그 아래에 놓여 있는 움직임인 것이다”라면서 힘주어 말했지요 “이것은 절망의 용기인 동시에, 모든 용기안에 있는 용기, 모든 용기를 초월하는 용기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말이나 개념 같은 것으로 안전을 기할 수도 없고, 이름도 없고, 교회도 없고, 종교도 없고, 신학도 없다. (777)
요컨대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플로티노스의 일자가 그렇듯 절대적 초월자이자 궁극적 포괄자인 겁니다. 이러한 신의 유일성에는 포괄성, 종합성, 전체성만 있을 뿐 고유성, 배타성, 폭력성이라고는 전혀 없지요. 그러니 이런 신을 믿는 절대적 신앙에는 당연히 이름도 없고 교회도 없고 종교도 없고 신학도 없을 수 밖에요. (777)
틸리히의 비판과 대안은 과연 정당할까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대신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을 ,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진정 필요로 할까요?
만일 기독교인들이 신을 모든 존재물 가운데 ‘가장 완전한자’ 또는 ‘가장 힘있는자’로 인식하고, 그래서 그의 유일성을 단일성, 고유성, 배타성으로 파악한다면, 그들은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 과 그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요. 하지만 만일 기독교인들이 신을 삼위일체의 상호내주적 또는 상호침투적 사랑으로 인식하고, 그의 유일성을 삼위일체 신의 본질인 본질공동체적.영원동등적 포괄성과 통일성으로 이미 파악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에 대한 신앙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를 추구하느 비위계적.비지배적 ‘인간공동체 원형’으로 나타난다면, 틸리히의 ‘하나님이상 가는 하나님’과 그에 대한 ‘절대적 신앙’은 전혀 필요치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그러한’ 신을 그렇게 신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78)
신의 유일성이 연대와 협력의 근거
폴란드 출식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예리하게 갈파한 대로 이제 공포는 낮에도 밤에도,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선진국에서도 후진국에서도 피할 수 없고 예측 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공포를 “유동하는 공포”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불안과 공포마저 세계화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780)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고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낳으며,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세계 평화를 이룬다는 말이지요. 이는 ‘신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며,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다. 라는 내가 이 책에서 기본 강령으로 삼은 것과 깊숙이 연관된 문제의식입니다. (781)
분명한 건 기독교도 이제 세계평화와 인류 공존을 위해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하는 데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입장에서 종교적 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가능한 덜’ 포기하면서 타 종교의 신앙을 ‘되도록 더’인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본디 차별적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의바탕이니까요. 종교적 다원주의에 관한 건전한 연구와 논의는 ‘신의 유일성 어떻게든 보존하면서’가 아니고 어떻게 ‘신의 유일성을 근거로 하여’ 다른 종교와의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 낼 것인가에 모아져야 합니다. (782)
오늘날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의 다양한 주장은 보수주의(근본주의자)들이 지지하는 배타주의, 2차 바티간공회의 이후 가톨릭이 지지하는 포용주의,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다원주의가 그것입니다. 신의 유일성은 기독교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또 포기해서도 안되는 신의 속성입니다.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인류 모두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지요. 그와 동시에 유일성과는 관계없이 또한 오해되고 있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두말할 나위없이 신의 유일성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이해와 교회의 전향적 선포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각 교파와 종파의 입장이 달라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론적으로는 포용주의를 통해서든 여타의 다원주의적 방법을 통해서든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신의 삼위일체적 특성에서 ‘인간 공동체 원형’을 발견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몰트만의 방식이 무엇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이론이 신의 유일성에 대한 선포가 배타성과 폭력성 그리고 획일성에 대한 교훈이 아닌, 오직 포괄성과 통일성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명백히 설명해 주기 때문이지요.(784)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미켈란젤로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레미야, 즉 다른 누구보다 거친 말투로 당대의 성직자들을 통렬히 꾸짖던 예레미야 선지자를 교황의 옥좌 바로 위에 그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부패하고 독석적인 카톨릭교회와 성직자들에게는 선지자도 화를 내며 걱정하고, 사람들도 슬퍼하며 등을 돌리고 떠난다는 엄중한 메세지를 그림 안에 담아 놓았다는 것이지요.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교인들이 성당 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보일뿐 아니라 성스러운 제단 바로 위에 위치하는 그 부분에 이왕이면 거룩한 그리스도가 그려지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청을 무시하고 구약성서에서도 다른 선지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하게 다뤄진 요나를 그려 넣었지요. 미켈란젤로가 4년 넘게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거대한 천장화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메시지는 당연히 이렇게 정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뜻을 거역하는 독선적이고 탐욕적이며 배타적인 성직자와 교인들아! 너희들은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신의 가혹한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에게 밝혔듯이 신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아끼기 때문이다.”(790)
1517년 마르틴루터가 처음으로 카톨릭교회에 저항한 이후 한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유럽인 상당수가 프로테스탄트로 바뀌었습니다. 저항세력들도 우후죽순 생겨났지요. 1530년 나폴리에서 후안 데발데스가 이끌던 비밀결사단체인 ‘계몽된 사람들’ 도 그중하나였습니다. 발데스가 죽은 후 비토리아는 또다른 비밀결사조직인 ‘영적인 사람들’을 이끌었는데 미켈란젤로도 이 단체의 열렬한 구성원이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바티칸을 개혁하고 궁극적으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화합시켜 하나의 교회로 만드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건 이룰 수 없는 허망한 꿈이었고, 가톨릭 교회와 바티칸 성직자들을 향한 미켈란젤로의 환멸과 절망 그리고 분노는 점점 더 높아만 갔습니다.(792)
미켈란젤로는 노구를 이끌고 7년이나 그린 <최후의심판>을 끝내면서 미노스를 <천지창조>의 요나처럼 맨 마지막에 그려 넣었지요. 그런데 지옥의 심판관 미노스가 당나귀 귀를 달고 거대한 뱀에 온몸을 휘감긴 채 생식기를 깨물리는 끔직한 벌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 점이 매우 특이합니다. 이 그림은 그리스신화나 신곡에서도 전혀나오지 않는 묘사입니다. 그의 얼굴이 당시 교황 바오로 3세 다음으로 지체가 높았던 의전관 비아지오 다체세나 추기경과 똑같은 미노스의 얼굴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체세나는 그 누구보다 독선적이고 탐욕적이며 또한 그만큼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성직자였지요. (796)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그것을 빌미로 이교도들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 사실상 그들이 믿는 경전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지요.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 그들이 배척과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 동력이 사실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조건이나 이기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교묘히 감춘 채 종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이슈들을 내세워 추종자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는 것이지요.(798)
자기성찰은 문명의 자기파괴적 잠재력이 상존하는 ‘위험사회’에서 피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유동하는 공포’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우리가 이 같은 자기성찰을 얼마나 철저하게 또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을 겁니다. 아닌가요? (799)
존재론적으로 보면 존재보다 더 큰 범주는 없습니다. 존재는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자기 자신은 아무것에도 포괄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신이 존재라면 그는 유일합니다. 이미 수차례 밝혔듯이 어떤 것이 만물의 ‘궁극적포괄자’라면 그것은 ‘유일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것의 바깥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면 그는 이미 ‘궁극적 포괄자’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신이 존재인 한 유일자라는 것은 존재론적 결론이나 논리적 귀결입니다.(799)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일자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성도 동시에 갖고 있지요. 일자성은 무규정성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이지만, 삼위일체성은 사랑에 의한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본질공동체적.영원동등적이고, 몰트만의 표현을 따르자면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 사랑이 그 본질이지요. 여기에는 서로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인 하나됨’을 이루는 ‘이종사랑’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한 그것(성령)을 통해 우리가 우리들 서로 간의 친교를 세우고, 그분들과의 친교도 세우기를 원하셨다”라고 표현했고, 볼트만은 “피조물들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지 아”읂면 안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이 가진 포괄성과 통일성으로서의 유일성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유일자입니다.(801)
맺음말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개인의 심리, 성적취양, 소수자의 권익,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 등에 몰두하고 있지요. 라캉과 푸코가 입증했고 리오타르가 적절히 언급한대로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큰 이야기’가 가진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지요. 문제는 우리가 ‘큰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도 전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지요. 오직 탈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의 삶과 세계의 역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 주며, 우리를 위협하는 다양한 공포로부터 방어막이 되어 주던 모든 것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기희생과 헌신을 이끌어 내서 인간과 세계를 가치 있게 하던 신은 죽어버렸고, 인류애와 연대를 통해 사회를 진보시킬 이성과 주체도 소멸해 버렸지요. 모세의 지팡이는 부러졌고 유토피아를 향해 치켜들던 레닌의 팔을 잘렸습니다. 작은 이야기들이 큰 이야기들을 차례로 몰아내고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됨으로써 시대마다 유효했던 공인된 처방들이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휴지고각이 되어버린 겁니다.(806)
내 생각에 이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작은 이야기도 하되 큰 이야기도 함께 하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게 하자는 거지요. 이미 1600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탐욕을 치료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틀의 처방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탐욕, 곧 ‘자기사랑’과 ‘물질 사랑’의 끈질긴 성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이 모두 네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위에 있는 신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며, 셋째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이고, 넷째는 아래에 있는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이 네가지 사랑이 합쳐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사랑’안에서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이 신 사랑과 이웃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신 사랑과 이웃사랑이 자기 사랑과 물질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줍니다.(809)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함께함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온전한 담론’이 되게 하자는 것이지요. 곧바로 예상되는 난제는 서로 상반.대립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한데 아우를 수 있는가, 충돌하는 가치들을 어떻게 종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바우만의 표현을 빌려 바꾸어 보면 그 난해성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세계화와 함께 시작된 지옥에서 살아남기에도 급급한 우리가 어떻게 사냥도 하면서, 정원도 가꾸고, 사냥터에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책에서 집요하게 천작해 온 기독교의 신 개념은 애당초 상반.대립하는 히브리 종교와 그리스 철학의 불가능한 종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이루어 낸 최초이자 최고의 종합이었지요. 우리는 당시 최고의 학자들이 이뤄 낸 놀라운 지적 노력을 추적하면서 상반.대립하는 것들을 하나로 종합하는 다양한 기법들- 탈시간화와 시간화의 논리, 러브조이의 이중적 논법, 쿠사누스의 대립의 일치, 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 페리코레시스에 대한 몰트만의 해석등-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찰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새로운 종합을 이룰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810)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야겠지요. 여기서부터 희망입니다. 역사는 불행히도 가치의 파편화를 낳았고 파편화된 가치들은 인간과 세계를 위기로 몰고 있지만, 어둠이 내리면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르지요. 고대가 저물어 갈 무렵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이 이뤄졌고, 중세가 황혼에 물들 때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고 새 길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의 인문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