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일본여행기-박선영

일본여행기-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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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선영님과 나는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자기계발 프로그램에서 함께 공부하고 실천하는 동료의 인연을 맺었다. 그후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SNS의 글과 몇차례 만남을 통해 마치 가까운 이웃과 같이 서로의 안부와 소식을 전하고 있다.

아키텍쳐를 설계하는 소위 기획이라는 영역에 있는 분들을 항상 부러워한다. 왜냐면 나는 항상 먼저 뛰쳐나가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만 장기적인 그림과 플랜을 만드는 유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선영님과의 만남과 글을 통해 나는 동기와 밖으로 뛰쳐나갈 에너지를 얻는 소중한 인연이다.

일본 가족여행을 하면서 지은 글을 유료로 구독하는 회원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면서 나는 감탄할수 밖에 없었다. 정말 멋진 기획이 아닌가? 당장 나는 몇백만원의 거금도 아닌 몇천원의 구독료를 입금하고 글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 구독료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여행끝난후 공개하는 깜짝쇼까지 기승전결이 완벽한 기획이자 에세이 프로젝트였다.

순간순간 포착한 자신과 가족의 감정선이 세심하게 살아 움직이듯 생생한 글이다. 하루하루 여행은 당연히 갈등-긴장-해소가 뒤풀이되는 인생의 풍경이 몇일간의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압축되어 반복된다. 그속에서의 긴장과 해소는 여행에서만 느낄수 있는 경험임을 선영님의 글속에서 다시한번 느낄수 있다.

글속에 내가 들어가서 막 참견하고 싶고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생생한 생명력이 있는 에세이 글이다. 그래서 일까? 이런 생생함이 눈앞에서 그려지는 듯한 글이 주는 에너지가 나는 좋다. 이러한 에너지는 나를 일어나서 쓰게 하고 무언가 만들게 하는 에너지이다. 나와 같은 ISFJ에게는 아내와 마찬가지로 선영님과 같은 글과 조언이 항상 나를 달려나가게 한다.

몇천원의 구독료는 이렇게 멋진 이국적인 선물로 다시 나에게 되돌아 왔다.

영선님의 어슬렁 여행기

어슬렁 1회차

‘이 남자, 그냥 확 버리고 가?!’

마음 깊은 곳에서 열이 오르니 코에서 김이 쉭쉭. 마스크 낀 안경 아래에 옅게 김이 서렸다. 우여곡절(?) 끝에 입국심사를 마쳤건만, 출국장을 빠져나와서도 분하고 서러운 마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남편이 화장실 간 사이, 아이에게 물었다.

“네 졸업여행인데 화 내서 미안. 그런데 이번엔 진짜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아.”

“엄마, 화 내도 괜찮고 (아빠랑) 싸워도 괜찮은데… 제발 먹을 때만 싸우지마. 특히 디저트 가게나 카페 갔을 때.”

문제가 발생한 건 아이의 패스트트랙(일본 입국 검역 사전등록)이었다. 후쿠오카 공항의 느리고 느린 와이파이 리뷰에 대한 증명인 듯, 주한 일본영사관에서는 사전 입국/검역 등록 화면의 스크린 캡처를 권장했다. 스크린 캡처? 당연히 했다. 남편에게도 알려줬지. 그런데 아차차. 미성년자 동반가족, 아이의 것을 깜박했다. ‘아니, 동반가족 이야기는 왜 공지에서 안 하냐고!!!’ 투덜거려 봤자 엎질러진 물.

후쿠오카 공항의 free wifi는 어찌나 느린지 사전등록 페이지 접속 조차 하세월. 착륙과 함께 교체한 일본 유심도 무용지물이다. 

“그걸 안 했어? 왜에?” 힐난하는 듯한 남편의 목소리가 출국심사 내내 마음속에서 메아리쳤다.  (본인은 여전히 순도 100% 염려를 담아 한 말이라고 주장 중.)

‘허… 나도 내 한 몸만 챙기면 빈틈없이 한다고. 내 여권 아이 여권, 숙소 검색해, 숙소 예약해. 여행정보 찾아, 여행 짐 챙겨. 일주일간 집 비우니 냉장고도 미리 정리해야지. 음식물 쓰레기 처리해, 분리수거 해. 할 일이 수십 가지인데…’

이렇게 씩씩 댈 일인지, 나조차 속 좁은 스스로가 어이없으나… 서러움이 한번 폭발하니 멈추질 않았다. 아빠와 공항 편의점에 다녀온 아이가 복숭아 음료를 건넸다.

“어때? 엄마가 좋아하는 맛이지? 처음 마셨을 때랑 마신 후랑 입에 남는 향이 다르지? 신기하지?”

눈치를 살피며 아빠에게 한쪽 눈을 찡긋. 그 모습에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어… 엄마 화 풀렸다. 아빠, 엄마 화 풀렸어.”

에잇. 더 버텨야 했는데… 여행은 그렇다. 웃음이 헤퍼지더라.

코소크 기타야. 호스트 미키가 알려 준,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 한 획 한 획 공들여 수첩에 옮겨 적은 한자를 보여주자, 매표소 직원이 무인 발권기계로 안내했다. 꾹꾹 몇 개의 버튼을 눌러 승차권을 발권해 준다. “아리가토오 고자이마스~” 감사인사 후 세 장의 버스 승차권을 받았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승차권이 앙증맞다.

12시 30분. 버스에 올라 미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방금 버스 탔어요. 우리를 알아보기 쉽게 다음 설명을 보내요. 나는 갈색 재킷에 진한 핑크색 크로스 백을 매고 있어요. 딸아이는 열두 살이지만 키가 나와 비슷해요.”

기타야에 하차하고 보니 ‘나 왜 그런 메시지를 보냈음?!’ 싶다. 눈에 띄는 여행용 캐리어에, 배낭을 한 개씩 짊어진 우리는 그 자체로 충분히 ‘여행객’이었다.

“이 집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이었어요. 1970년대에 지었데요. 두 분 모두 여기서 94세, 93세까지 사셨어요. 이 그림은 우리 할머니가 그린 거예요. 리모델링이요? 아니요. 두 분이 사시던 그대로 2016년부터 에어비앤비를 하고 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집이 어두운(?) 느낌이 들었어요. 두 분이 떠나신 후 에어비앤비를 시작했어요. 손님들이 머물면서 집이 점점 밝아져요. 그것이 너무 기뻐요.”

집안 곳곳 얼굴도 알지 못하는 미키의 할아버지 할머니 모습이 엿보였다. 방과 거실에서 만난 노약자용 안전손잡이. 휠체어(?)의 이동을 고려한 경사면. 주인의 취향이 엿보이는 그릇장 속 그릇과 소품들. 잘 길들여진 책상과 의자. 곱게 나이 든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근사하게 나이 든 집은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집 소개를 마친 후, 미키는 차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차와 함께 따뜻하게 데운 물수건과 고운 종이 포장의 디저트가 코타츠 위에 올랐다. 물수건 받침(?)에 한번,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함에 또 한 번 마음을 빼앗겼다. ‘돌아가기 전 이런 물수건 받침을 꼭 장만해야지’ 엉뚱한 목표가 생겼다.

미키가 떠난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코타츠 아래로 몸을 누였다. 

“자면 안 돼. 지금 잠들면 밤까지 자게 될 거야. 겨우 일주일인데, 그 중 하루를 잠자느라 보내버릴 거야?” 남편이 외쳤지만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조차 코타츠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스르륵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미키에게 보이스톡이 왔다.

“지금 하늘에 무지개 떴어요. 밖으로 나가면 무지개 볼 수 있을 거예요.”

이 여행 기대된다. 첫날부터 무지개라니. 빨주노초파남보 넘치는 행운이라니~

내일부터는 어슬렁 총총총 미키가 알려준 맛집 멋집을 하나씩 방문할 예정. 3살부터 오고리에 살았다는 미키는 이렇게 말한다.

“딱히 여러 관광지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제가 정말 좋아하는 동네(이기) 때문에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언제든 뭐든지 물어보세요. 그리고 편하게 미키라고 불러주세요.”

내일의 오고리는 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두근두근.

어슬렁 2회차

<뇨이린지 사원 불산책>. 구글 번역기는 정확하게 저렇게 알려주었다. 매년 1월 진행되는 행사라 했다. 마침 우리가 오고리에 온 다음날인 1월 17일이 불산책 있는 날.

“불 위를 맨발로 걸어가는 건데, 뜨겁진 않아요. 불이 거의 꺼질 때 그때 걸어요.” 호스트 미키의 설명에 귀가 쫑긋. 불 위를 걷는다고? 미키가 전해준 링크 페이지를 펼쳐 구글 번역기를 돌렸다. 세상에, 불산책 이란다. 불 축제도 불 이벤트도 아닌 불산책. 이러면 안 가 볼 도리가 없잖아.

8시 3분 기상. 오고리의 아침을 살펴보려고 남편과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여행의 목적지를 후쿠오카로 정한 후(일정 맞는 비행 편이 후쿠오카뿐이었음) 1박 2일간 에어비앤비와 네이버와 구글을 최대한 탈탈 털었다. 없구나, 없어. 심쿵 숙소가 한 곳도 없어. “가지 말까, 일본?” 체념하던 순간 발견한 것이 미키의 숙소였다. 

사실 사진 속 공간들이 혹 하게 매력적인진 않았다. 93개의 리뷰를 모두 읽었다. 그 리뷰들을 통해 호스트 미키에 대해 짐작해 보게 되었고 관심이 생겼다. 다시 살펴본 숙소 소개에서 처음엔 발견하지 못했던 매력 요소들을 찾았는데, 그중 하나가 3대의 자전거였다. ‘어머, 이 호스트 남다른걸’ 싶었다.

낯선 동네 낯선 골목의 아침을 좋아한다. 그냥 아침 말고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학교 가는 아이들, 출근하는 사람들, 가게 오픈 준비로 바쁜 점주들. 시작하는 사람들의 기운으로 거리가 명랑해지는 그런 아침이 좋다. 

어제는 걸어서 5분 거리 타코야끼 집 까지도 “언제 도착해? 얼마나 더 가요?” 하며 걸었는데 자전거를 타니 모든 것이 휙휙 씽씽. 타코야끼 집은 진즉 지났고 건널목 건너 Mitsusawa역을 지나 초등학교 까지도 금방이었다. 혼자 있을 아이가 걱정되어 그쯤에서 자전거를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니 9시 32분. 아침을 챙겨 먹으면 오늘의 모든 일정이 늦어질 것 같아 마음이 바빴다. 이럴 땐 아침 따윈 건너뛰어도 좋으련만. 세상 어떤 힘보다 밥심이 중요한 남편과 아이임을 알기에 느긋하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어쨌건 내 목표는 불산책. 뇨이린지로 13시까지만 가면 된다. 

아침 기상시간은 공들여 세운 도미노의 첫째 칸 같다. 일찍(내 기준에서 오전 6시) 시작하면 착착 착착착 무리 없이 도미노들이 일정한 박자로 다음 블록을 밀어준다. 하지만 조금만 늑장 부리면(최악은 9시 이후 기상) 두서없이 엉켜 어느 순간 흐름이 끊겨 버린다. 다음 도미노를 밀어줄 수 없게 된다.

 “이야, 선영아 여기 와서 이것 좀 봐.”

혼자 아침 준비를 하던 남편이 나를 불렀다. 오늘의 불산책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 싶었던 나는 대답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코타츠로 냄비를 들고 와 냄비 안을 보여준다. “우와~~~” 나의 크고 깊은 감탄사에 침실에 있던 아이까지 건너와 또 한 번 “우와~~~”. 편의점 냉동우동 하나에 우와가 도대체 몇 개? 실한 내용물만큼 맛도 좋았다. 면발은 탱글, 어묵은 쫀득, 표고버섯 마저 풍미가 남다르다. 맛있는 걸 혼자 꿀꺽할 순 없지. 딱 한 개 있던 표고버섯은 한 입씩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아침 준비하고 / 치우고/ 정리하니 시간은 어느새 10시 43분. 모든 과정에서 남편은 주연, 나는 조연이었다. 학생 때는 주연이 제일 좋은 것, 꼭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지. 살아보니 아니다. 조연이 더 탐나고 갖고 싶을 때도 있더라. 특히 집안일은 언제나 조연이고 싶은. 여행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주연 아닌 조연이면 좋겠네.

양치한다 해 놓고 양치 안 하고, 옷 입는다 해 놓고 옷도 안 입고. 어슬렁 거리는 딸과 아내 때문에 남편만 숨 넘어간다. 빨리빨리 남편의 재촉을 받으며 뇨이린지를 향해 출발했다. 분명 절이라 들었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더 넓은 길, 근사한 집들이 나타났다. 뇨이린지 가까이에는 이국적인 건물들이 여럿. 남편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일주일의 여행을 위해 일주일치 일을 몰아서 한 남편은 출국 직전까지 새벽 3시가 되어서야에 퇴근했다. 그 와중에 구글 지도를 꼼꼼히 분석, 오고리 카페와 디저트를 심층분석 했다고 장담하더니, 그 말 진짜였구나.

“저긴 스콘 전문 카페, 맞은편 카페의 애프터눈 티세트도 평이 좋아. 뇨이린지 바로 앞 카페는 딸기 디저트가 유명하데. 길 건너에도 카페가 있는데 특이하게 식사메뉴로 카레를 팔아. 맞은편엔 가가라고 라멘집. 만두와 연잎밥도 있어서 (고기국물 못 먹는) 엄마도 갈 수 있을 거야.”

술술술 아이에게 설명하는 남편이 근사해 보였다.

뇨이린지. 한국이름은 개구리절이라더니, 이름처럼 입구에서부터 구석구석 개구리가 안 보이는 곳이 없다. 다행히(?) 살아있는 개구리는 단 한 마리도 못 만났지만. 13시가 가까워오자 사람들은 불산책이 열리는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무리에 끼어 움직였다. 통이 넓은 대나무를 사용해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야외 관람석을 만들어 두었는데, 사람들이 그곳에 앉기에 나도 재빠르게 제일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화려하게 장식한 장대를 선두로 여러 명의 스님이 줄지어 계단을 내려오며 행사는 시작되었다.  둥그렇게 만들어진 야외 행사장에 새끼를 둘러 객석과 행사공간을 구분해 두었는데, 행사장 중앙에는 불을 지필 나무들이 쌓여 있었다. 성인 남자 키보다 더 큰 대나무를 두 개 세워 행사장 입구임을 표시하고 그 사이는 새끼로 연결해 입장을 막아두었다. 선두에 선 스님이 행사장 입구에서 멈춰서더니 큰 칼을 꺼내들었다. 칼을 머리 위로 치켜올렸다가 아래로 슈욱. 분위기상 출입을 막은 새끼줄이 한방에 툭 끊어져야 할 것 같은데… 다시 또다시 내리쳐도 끊어지지 않은 새끼줄. 결국 진행요원이 매듭을 손으로 푼 후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쿡쿡 곳곳에서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시종일관 긴장하고 경건해야 하는 행사는 아니구나. 안도했다. 

큰 스님(눈치상 그러하다고 추측)의 말씀 이후 ‘액운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추측되는 퍼포먼스들이 이어졌다. 도끼, 칼, 활. 총이 등장하기 이전 대표 무기들은 모두 등장한 듯. 드디어 행사장 중앙의 나무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하얀 연기가 행사장 절반을 가득 채웠다. 후쿠오카행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구름뭉치 같은 연기. 절에서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향이 마스크를 비집고 들어왔다. 연기를 들이마시면 행운이 오는 건지, 앞자리 할머니가 오른손을 부채처럼 펄럭이며 연기를 들이마시기에 나도 따라서 스읍 스읍 열심히 연기를 마셨다. 

새하얀 연기구름도 잠깐,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산비탈 제일 윗줄에 앉은 내게 까지 열기가 느껴졌다. 한참 기세 좋게 타오르더니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곳을 넘지 마시오’ 경고하듯 둘러쳐진 새끼줄. 그 밖에서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새끼줄 안 스님들에게 하나 둘 자신의 가방이나 겉옷 등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받아 든 스님은 잦아든 불 위로 그네들의 물건을 서너 번 흔든 후 돌려주었다. 지팡이, 손가방, 재킷 등등. 건네는 물건도, 건네려는 사람도 점점 다양해지고 많아졌다. 산비탈 위에서 그 모든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무탈하고 무병하기를 바라는 그들의 마음이 꼭 내 마음 같아 다가가 꼭 안아주고 싶었다. ‘엄마의 파킨슨 증세가 호전되기를, 아버지의 건강이 지금 같기를, 남편의 일이 순탄하기를, 아이가 중학교에서도 즐겁고 행복하기를.’ 짧은 순간 참 많은 것들 소망했다.

이제 남은 것은 진짜 불산책.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하기에 남편과 나도 서둘러 움직였다. 주변 사람들이 신발을 벗자 우리도 벗었다. 양말을 벗기에 우리도 벗었다. “할 거야?(안 하면 안 돼?)” 묻는 아이에게 당연하지 답했다. 남편은 아이도 함께 했으면 했지만 나는 알지. 설득한다고 설득될 열세 살이 아니라는 걸. 고양이를 찾아보겠다면 아이는 혼자 절 안으로 이동했다.

미키의 말처럼 불산책은 뜨겁진 않았다. 여전히 열기가 남아있어 재를 밟은 발바닥에는 온기가 느껴졌다. 준비해 온 타월을 반으로 접어 흙도 묻고 재도 묻은 발바닥을 툭툭 두드리고 있으니 “그렇게 해서 되겠어?” 남편이 쪼그려 앉아 발을 닦아준다. 왼발 바닥을 쓱쓱, 오른발 바닥도 쓱쓱. 꼼꼼하게 세심하게 닦아준다. 연애 때도 없던 달달함이 세상에 여기 있었구나.  후쿠오카현 오고리시 뇨이린지에 이렇게 콕 박혀 있으니 다정할 수가 없었네. 달달할 수가 없었구나. 남편의 의외의 모습을 발견한 불산책이었다.

엄마는 불산책으로 기분 최고건만, 지루한데 허기까지 진 아이의 기분은 별로. 초밥 먹고 싶다 해서 찾아간 초밥집은 하필 브레이크 타임. 두 번째 초밥집도 역시나. 세 번째 라멘집은 구글번역기가 말하길 ‘국수의 신’이라 했으나 “번역기야, 너 제대로 일한 거 맞니!” 우리 가족이 반할 맛은 아닌 걸로. 여전히 경쾌하지 않은 따님의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며 남편이 ‘딸기 디저트’라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으나, 해당 카페는 코로나로 인한 임시 휴업 중. 

바닐라 슈크림, 딸기 파르페. 레몬 마들렌. 말차 슈크림. 축 처진 우리 딸 기분을 한방에 끌어올린 기특한 녀석들. 휴업 중인 카페에서는 다행히(?) 베이커리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는데 매장 분위기도 패키지도 범상치 않았다. 역시는 역시. 맛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탁월했으니… 

“여기 몇 시에 문 연다 했지? 9시 30분? 아침 먹고 자전거 타고 휘리릭 와서 사면되겠다. 세상에 너무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슈크림 오랜만이잖아. 여보! 맛본다 해 놓고 그렇게 많이 먹어버리면 어떡해요!!!”

난리 난리. 맛있는 디저트를 발견했을 때 가장 시끄러워지는 가족이다. 

이어 찾아간 카페는 남편이 베스트 오브 베스트일 것이라 자신했던 곳. 마돈나 파르페, 푸딩 파르페, 오늘의 케이크와 진저 에이드. “세상에.” “웬일이니.” “이거 먹어봐, 이것도.” 바테이블에 일렬도 앉은 우리는 포크와 포크, 티스푼과 티스푼을 주거니 받거니 부산을 떨었네.

구글번역기까지 동원해, 영업시간과 휴점일, 브레이크타임까지 묻자 주인은 오고리에 언제까지 머물 거냐 물었다. 자신 있게 일곱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가 아차차. 서둘러 둘을 접었다. “See you!”라는 인사에 주인이 환하게 웃었다. 

“메뉴판 찍어왔지? 내일은 커피젤리 파르페 먹을래.” 앞으로의 수목금토 4일 치 식재료를 사러가며, 우리는 내일은 어떤 디저트를 먹을지에 대해 세상 누구보다 진지하게 의견을 나눴다. 

오늘의 오고리는 오이시 오고리. 

내일은 또 어떤 맛의 오고리가 나를 기다릴 것인가,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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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S의 디저트 실물은 인스타그램 사진 보다 감동적이었습니다.  먹보 셋이 먹느라 사진 촬영을 하지 못해, ALES 공식 인스타그램에서 해당 사진을 담아왔습니다.  (상)마돈나 파르페 (하)푸딩 파르페

어슬렁 3회차

더는 못해! 안 해!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던 찰나 나는 보았다. 남편의 오른 눈썹이 꿈틀 하는 것을.

“엄마도 주문할 생각은 아니었어. 저녁에 다시 오더라도 해당 초밥이 가능한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확인하려고 물어본 거야. 그런데 너도 봤잖아. 주인 할아버지께서 너무 친절하게 1개씩 주문하는 거냐 묻는 거. 핸드폰 꺼내, 번역앱 찾아, 하고 싶은 문장 입력해서 다시 일본어로 번역하고… 후우. 그렇게 하기가 애매해서 그냥 주문한 거야.”

“아니 그런데 너. 말을 꼭 그렇게… 아무리 네 졸업 기념 여행이고, 전적으로 널 위한 여행이라도 이건 좀… 너무 배려가 없다고 생각히지 않니?”

여행이잖아, 박선영. 선영아, 여행이잖니. 욱하는 마음 누르며 애써 워워 했다. 맞은편에 앉은 남편의 눈썹에는 여전히 힘이 잔뜩. 분위기 전환 차 짐짓 명랑한 목소리로 “그래서 다들 뭐 먹을 거야? 바닐라 슈크림? 아니면 말차(슈크림)?” 물었다.

“난 됐어.” 

딱딱한 목소리로 남편이 말했다. 

“나도 안 먹을래.”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아이도 말했다. 

“그럼 내 것만 산다. 내 것만 사 올 거니까 한 입만 이런 거 절대 없어.”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아무렇지 않기는 무슨. 부글부글 부글부글 마음이 제대로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추가 주문한 초밥을 기다리는 남편과 아이를 뒤로 한 채 초밥집을 나왔다. 혼자 레브 드 베베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레브 드 베베의 슈크림볼은 최근 몇 년간 먹은 슈크림볼 중 최고였다. 바닐라와 말차, 2가지 종류 중 무엇을 선택해도 다른 하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엄지 척 슈크림볼. 오고리에 머무는 동안 매일매일 먹어줘야지.

직진 후 좌회전. 초밥집에서 레브 드 베베 가는 길은 쉽고 간단하다. 이미 두 번이나 가 본 터라 지도앱 없이도 척척이다. 마음이 부글거리니 걸음도 씩씩거린다. 초밥집을 나선 지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레브 드 베베에 도착했다. 마음 바뀌면 카톡 남기라 했건만, 남편도 아이도 잠잠. ‘진짜 내 것만 살까? 그럴까?’ 

말차 슈크림 셋, 바닐라 둘 그리고 *아마오후 딸기를 통째 넣은 찹쌀떡을 주문했다. (*아마오후 딸기는 후쿠오카의 특산물로 일반 딸기보다 크고 달다고 함.)

화가 났다. 

“아주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줄 알지.” 

짜증도 났다. 

“애가 먹고 싶다고 할 때 바로 주문 좀 하지.” 

슬프기도 했다. 

‘맨날 이러지, 맨날.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어. (나를 포함) 다 제 입맛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고집불통들 같으니라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짜 이대로 괜찮은 걸까?’ 심각해졌다. 무슨 가족이 이러냔 말이지. 툭 하며 삐지고 다투고, 하루에도 수십 번 삐걱삐걱.

오늘은 호스트 미키와 유기묘 보호카페에 가기로 한 날이다. 미키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1시. 어제 못 먹은 초밥을 반드시 먹고야 말겠다는 아이의 뜻을 존중해 11시 오픈 시간에 맞춰 초밥집에 도착하기로 어젯밤 잠들기 전 마음을 맞췄으나… 초밥집을 향해 집을 나선 시간은 11시 47분. 아침부터 삐걱삐걱 심상치 않다.

1차 삐걱. 아침을 건너뛰고 초밥집으로 가자는 나.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 한다며 기어이 식사 준비를 한 남편. 아침 식사를 시작한 시간은 9시 42분이었다.

2차 삐걱. 아침에 감은 머리가 여전히 젖어있건만 드라이하란 말에 꿈쩍도 않는 아이. 결국 욕실의자에 앉히고 드라이를 해 줬다.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애 아프면 엄마가 고생이니까. 내겐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3차 삐걱. 결국 초밥집으로 출발한 시간은 11시 47분. 약속 시간을 30분 늦출 수밖에 없었다. ‘굳이 아침은 먹자 해서…’ 속으로 남편을 원망했다.

4차 삐걱. 런치 세트 3인만으론 양이 부족할 것 같다며, 남편이 추가할 메뉴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는 런치 세트가 나오고 난 후, 음식량 확인 후 추가 주문 하자고 제안했으나, 그렇게 하면 주문 메뉴가 준비되기까지 시간이 촉박해 지금 해야 한다며 남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저거 저거 또 남게 생겼구나’ 남의 일인 양 방관했다. 풍성한 식탁에 민감한 남편의 성향을 알기에.

5차 삐걱. 이번엔 아이가 성게 초밥과 연어알 초밥을 추가하고 싶단다. 일본어 메뉴판을 두 번 세 번 구글번역기로 확인해도 성게와 연어알은 보이지 않았다. 없을 리가 없는데… 남편은 종이와 펜을 꺼내 무언가를 찾고, 쓰기 시작했다. 아이는 “먹고 싶은데… 먹으면 안 돼?” 혼잣말처럼 꿍얼꿍얼.

결국 남편이 “시간이 없어서 안 돼.” 했다. “슈크림 먹으려면 런치 세트 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아. 저녁에 다시 오자, 저녁에.” 나도 가세해 아이를 설득했으나 글쎄. 녀석의 표정은 그다지. 

6차 삐걱. 부족한 것은 없는지 주인 할아버지께서 테이블을 살피러 오셨고, 나는 여행책자를 참고하며 ‘성게와 연어알’이란 두 단어를 말했다.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오른손 검지를 세우며 “이찌?”라 물었다. 다음 답변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7차 삐걱. “그럼 슈크림은? 안 먹어?” 할아버지가 테이블을 떠나자마자 아이가 따지듯 물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편의  눈썹이 꿈틀. 남편도 나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내가 저녁에 (성게 초밥과 연어 초밥을) 먹는다고 했잖아.”

‘이 눔의 자식이 진짜. 말을 그렇게 밖에 못 해!’ 머리로만 버럭 했다. 재주다, 재주야. 어쩜 그렇게 콱 쥐어박고 싶게 말을 하는 건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먹고 싶었던 것을 먹게 된 것이니 좋은 거 아닌가. 하나를 얻었으면 하나는 놓을 줄도 알아야지. 슈크림은 이라니. 약속시간은 다가오는데 빵집 가지 질주를 하자는 거니. 뭘 어쩌란 말이니.

“그러니까 아빠가 먹고 싶다고 했을 때 바로 주문만…”

눈으로 버럭 하는 엄마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아이는 할 말 많은 얼굴로 말을 멈췄다. 

“다 싫어. 다 맘에 안 들어. 다 짜증 나.”

슈크림볼이 담긴 상자를 들고 집을 향해 뛰듯이 걸으며 연신 혼잣말을 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 가득한 욱 선생을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필이면 비까지 내려 나도 빵상자도 빗물에 축. 비에 젖어 흐물거리는 상자를 아이에게 건네니, 공손한 태도로 받아 냉장고에 넣는다. 기세 좋게 제 할 말만 하는 것도 반갑진 않지만, 한풀 꺾여 눈치 보는 모습도 마음 불편하긴 마찬가지. 

“말차랑 바닐라랑 둘 중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꺼내 먹어.”

‘흥칫뿡이네’ 나라면 절대 먹지 않겠으나,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말차 슈크림볼을 한입 덥석 베어 물었다. 

“그래서 반성은 좀 했어?” 

아이의 표정이 구겨졌다. 반성은 무슨, 여전히 할 말 많은 표정일세. 마침 미키 씨가 도착했고 저녁에 다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때엔 남편도 아이도 나도 기분이 경쾌하게 맑아져 아침의 삐걱삐걱에 대해 이야기하기 애매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아웅. 우리는 언제쯤 손발척 마음척 한결같이 사이좋은 가족이 되려나. 셋이 제각각 삐걱거려도 중심 잡기의 중대한 책임은 왜 항상 내게만 집중되는 것 같은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걸까? 어우, 이 미워할 수 없는 원수들. 그 이름은 가족 가족 가족.

어슬렁 4회차

일본 이름은 어렵다.

메이노하마. 롯폰마쓰. 니시테쓰하라오. 지요겐초구치. 하코자키큐다이마에. 두 번 세 번 불러도 돌아서면 메모를 봐야만 말할 수 있다.

일본의 이름은 쉽다.

후쿠오카. 오고리. 뇨이린지. 미추사와. 가야 할 곳, 갔던 곳은 신기하게 바로 외운다.

오늘은 하타카에 다녀왔다. 하키타, 하타키, 하키테. 여러 번 들어도 까먹더니 ‘하카타에 가자’ 결정하고 나니 신기하게 단번에 입에 붙더라. 하카타에 가기로 한 것은 문구류. 무인양품의 문구코너를(한국에도 있지만) 보고 싶어 하는 아이 때문이었다. 있을 것 다 있는 오고리지만 무인양품은 없다. 하카타는 여행책자의 소개만 봐도 하루가 부족하지 싶을 정도로 볼 것, 갈 곳이 많더라. 

JR시티 하카타만 해도 한큐백화점, 아뮤플라자, 킷테 하카타, 데이토스, 아뮤 에스토 등 5개가 넘는 쇼핑몰이 있다. 약 4만 5천 평 부지에 조성되었다는 캐널시티는 또 어떤가. 후쿠오카 대표 랜드마크라는 이곳 역시 그 규모가 으드드.

하카타로 출발하는 아침, 여행책자의 하카타 안내 페이지를 꼼꼼히 읽었다. 꼭 가고 싶은 곳엔 형광펜으로, 꼭꼭 가고 싶은 곳엔 형광펜 위에 다시 별표를 그려 넣었다. 인덱스용 포스트잇이 없어 마스킹테이프로 인덱스를 만들어 붙였다. 한큐/아뮤/푸드/쇼핑 등등. 깨알 같은 인덱스에는 ‘단 한 곳도 빼먹지 않겠어.’라는 쇼핑에 대한 각오가 담겨있었다.

[사진설명] 후쿠오카 랜드마크 중 하나로 꼽히는 캐널 시티.

캐널 시티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시간마다 열리는 분수쇼. 두 번이나 와우 하며 구경했다. ‘1996년에 이런 콘셉트를!’ 건축적 관점에선 볼만했으나, 내겐 딱 거기까지. 거대하고 화려한 것에는 한국도 뒤지지 않아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캐릭터샵 몇 곳과 무인양품만 보고 아이를 설득해 하카타 시티로 이동했다.

캐널시티가 정상에서 물러난 과거 톱스타 느낌이라면, JR시티 하카타는 현재형 톱스타 같았다. 세련된 매장, 넘치는 생동감, 새것 같이 말끔한 인테리어. 하지만 JR시티 하카타에 도착하니 시간은 어느새 17시 47분. 21시까지 영업이라는 책자의 설명과 달리 20시 폐점이란다. 마음이 바빴다. 일단 책자의 추천 코스대로 움직이기로.

아뮤플라자 8층 포켓몬센터로 갔다. 5분도 되지 않아 아이는 옆의 베이킹용품점으로 이동. 어느 순간 사라진(?) 남편은 에스컬레이터 옆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더니 아이는 신중하게 초콜릿몰드만 하나 구매했다. 7층 인테리어 숍은 입구만 보고 패스. 사실 나는 더 둘러보고 싶었으나 이번 여행의 주인공은 아이인 만큼 통 크게 양보(?)했다. 1층 도큐핸즈에서는 십여 분 넘게 머물렀다. 아이는 틴 케이스에 담긴 초콜릿을 단짝 친구 선물로 골랐다. 

딸기와 단발머리 소녀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틴 케이스는 내가 봐도 탐이 날 정도로 앙증맞고 고왔다. 자신도 마음에 드는 눈치라 “네 것도 사지, 왜 하나만 샀어?” 물었다. 틴 케이스만 마음에 들고 초콜릿은 필요 없는데 가격이 7천 원이 넘어서 제 것은 안 샀단다. “초콜릿은 엄마랑 아빠가 먹으면 되잖아.” “마음에 쏙 드는 건 일단 사야지. 나중엔 사고 싶어도 다시 못 오잖아.” 남편과 내가 적극적으로 꼬셔서 하나 더 구매했다. (7만 원이었다면, 아마 상황은 달라졌겠지?)

추가 틴케이스를 계산하고 나니 시간은 18시 58분. 도쿄 핸드 정반대 편 킷테 하카타 6층이 다음 목적지. 책, 잡화, 액세서리 코너가 있다고 해서 선택했다. 폐점시간은 다가오고 볼 것, 갈 곳은 여전히 많고. 걸음을 재촉하는데 도큐핸즈의 디스플레이 섹션에서 아이가 걸음을 멈췄다. 

“엄마, 이거(소녀 틴케이스)보다 저게(강아지 틴케이스) 더 예쁘지?” 

아이는 아까부터 강아지 일러스트를 마음에 들어 했다. 

“엄마가 다시 가서 교환해 줄까?” 

아이의 마음이 짐작되어 물었다. 잠시 갈등하는 녀석. 사용할 사람이 최우선이라 믿기에 내 의견 보단 상대의 의견에 맞춰 답을 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언제나 가감 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편이다.

“아빠는 이게(소녀 틴케이스) 더 나은 것 같은데. 이런 컬러감이랑 느낌은 흔하지 않거든. 이게 더 유니크해. 이게 더 좋아.”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서둘러 하카타역 광장을 가로질러 킷테 하카타로 향했다. 

‘최근에 오픈해 최신 트렌드의…’라는 여행 안내서의 설명과 달리 킷테 하카타는 우리에겐 별 매력이 없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리자마자 그대로 반대방향으로 직행. 하행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이제 어디로 가?” 지친 남편의 질문에 “한큐백화점 식품관!” 다음 목적지를 알려줬다. 그때 아이가 하는 말. “지금 몇 시야?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다이소로 가면 안 돼?”

다이소? 다이소!!! 황당해하는 남편에게 아이 몰래 고개를 가로저으며 여행책자를 펼쳤다. 다이소, 다이소. 여기쯤 있었는데… 이런. 다이소는 도쿄핸즈 옆 건물에 있다. 다시 말해 가로질러온 하카타역 광장을 또다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의미. 

다행히 다이소의 영업시간은 21시까지. 휴우. 아이는 바구니를 들고 총총총 넓디넓은 다이소 매장 안으로 사라졌다. 남편은 입구에 서서 기다릴 기세. 

“여보, 어디 카페에 가서 쉬고 있어요. 쇼핑 마치면 전화할게.”

당황하는 남편의 표정이란. 입구에서 기다릴 때부터 눈치챘다. 이분은 다이소 쇼핑이 길어야 10분 안팎일 것이라 믿었던 듯. 남편을 의자가 있는 어디론가 보낸 후 다시 도큐핸즈로 향했다. 번역앱 보다 실물사진이 빠를 것 같아 아이가 마음에 들어 했던 강아지 틴케이스를 먼저 카메라에 담았다. 매장 직원에게 사진을 보여주니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오라는 몸짓을 했다. 이리저리 매대를 살피던 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양손 검지손가락으로 엑스 표시를 했다. SOLD OUT. 이대로 포기하면, 박선영이 아니지. 해당 제품이 디스플레이된 방향을 가리키며 영어로 말했다. 

“전시 제품을 살 순 없을까요? 아이의 졸업 선물이에요. 아이가 정말 갖고 싶어 해서요.”

나는 영어로 직원은 일본어로. 신기하게 의미가 전해졌다. ‘그리하여 강아지 틴 케이스를 구매할 수 있었답니다’라는 엔딩은 얼마나 근사한가. 나는 두고두고 이 작은 무용담을 말하고 또 말할 텐데. 하지만 그런 행운은 없었다. 샘플이라서 안 된다는 단호한 거절. 대신 반대방향을 가리키며 “한큐, 한큐” 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하카타역 광장을 가로질렀지. 영업종료 시간이 임박한 백화점 식품관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했다. 판매원의 말을 단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무슨 의미인지 다 알겠더라. 할인판매 할인판매. 2개 사면 1개 더 드려요. 1개에 5천 원 3개엔 만원.

할인 중인 장어덮밥도, 맛있어 보이는 도시락도 모두 패스. 초콜릿 코너를 찾아 종종 거렸다.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혹시나 싶어 마카롱 코너도 케이크 코너도 모두 살폈다.

“엄마, 나 이제 계산해야 하는데…” 아이가 전화를 건 시간은 7시 57분. 40여 분 동안 고심해서 고른 것은 동전지갑과 고양이 스티커 단 두 개였다. 다이소 위층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남편은 슬램덩크 일러스트북을 손에 들고 더없이 행복해했다. 강아지 틴케이스만 구했으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이참에 도큐핸즈에 이메일이라도 보내봐? 극성 쇼퍼의 집요함이 스멀스멀.

유동인구도 많고 열차 노선도 여럿 인(오고리에는 1개 노선뿐) 하카타 역은 어려웠다.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던 우리는 남편의 주도 하에 3번 플랫폼으로 향했다. 3번 플랫폼, 8시 32분. 남편은 말했지만 그곳에는 이미 한 대의 열차가 정차 중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탑승하려 하자 남편이 만류했다.

“이거 가고 32분이 되면 열차가 올 거야.”

“잉? 지금이 29분인데?”

“그러니까 이거 가고 나면 다른 열차가 올 거라고. 그걸 타야 해.”

“이제 30분인데? 이 열차가 이렇게 있다가 32분에 출발할 것 같은데…”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마침 열차 안에 승무원이 있었다.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던 남편이 탑승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아이와 내가 탑승하자마자 열차의 문이 닫혔다. 자동문을 열고 객실로 들어서니 우와~ 비행기 1등석 못지않은 내부다. 가까운 빈자리에 털썩, 휴 이제 좀 살겠네 싶은 찰나 다가온 승무원이 낮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였지만 그 와중에도 ‘reserved’란 단어는 알겠더라.

“여보, 예약석. 예약석인가 봐.”

하지만 다음칸도 그 다음칸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 결국 우리는 호텔 라운지만큼 근사한 객실과 객실 사이 휴게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제야 걱정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이데로 휙 후쿠오카 저 편 어디로 우리를 데려가는 건 아닐까. 

구세주처럼 등장한 승무원은 우리에게 티켓을 보여달라 했다. 우리는 자신 있게 각자의 티켓을 내밀었다. 복잡한 표정의 승무원. 일본어로 열심히 설명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턱이 있나. 결국 핸드폰의 번역앱을 켰다. 우리가 탄 것은 특급(?) 급행(?) 열차 란다. 하카타에서 오고리로 가는 환승역까지 성인 2인, 소인 1인 비용이 800엔. 성인 2인에 소인 1인을 합해 1,250엔을 추가 지불했다.

이젠 당당하게 좌석을 차지해도 되겠지? 자리에 앉아도 되겠느냐는 제스처를 보이자 승무원은 4분 후 우리가 하차할 역에 도착한다 알려줬다. 1만 엔 넘는 비용을 내긴 했지만 30분 거리를 11분 만에 왔으니 다행이라며, 오고리로 가는 로컬 열차역으로 이동하며 우리는 다정하게 킥킥거렸다.

익숙한 민트색 열차를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그리웠다, 너. 이제 드디어 집으로! 안심하며 앉아 있는데 남편이 이런다. 

“방금 안내방송에서 시마이 라고 하지 않았어?” (다행히 남편도 나도 시마이의 의미는 짐작할 수 있는 상태.)

출입문 위 안내모니터를 확인했다. 이거 이거, 다음 정차역 이름이 이상하게 길잖아? 번역앱으로 확인해 보니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집으로 가는 길 한번 참으로 어렵다. 결국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역에서 하차, 몇 분을 기다려 다음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고리를 사랑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하카타는 어땠냐는 미키의 메시지에 누가 뭐래도 우리는 오고리. 오고리가 좋다고. 오고리의 고즈넉이 오고리의 어슬렁이 그리웠다 답하자 미키가 건넨 인사다.

후쿠오카현 오고리시 미사와로 2409-12. 

오래오래 기억될 오고리 우리집.

어슬렁 5회차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구나. 새벽 5시 10분 잠에서 깨며 가장 먼저 든 생각. 

1월의 오고리는 춥다. 특히 바닥. 온돌이 아닌 일본 전통가옥은 맨발로 걷기엔 발이 시리다. 웃풍도 심하다. 코타츠에 다리를 넣고 앉아 있자면 밖으로 나온 어깨와 등이 선뜩 하다.

“추워, 추워, 추워.”

해만 지면 춥다고 말하며 코타츠에 껌처럼 붙어 꼼짝도 않는 나를 남편은 끌끌끌 바라보곤 했다. 밤이면 아침에 입을 옷을 코타츠 안에 넣어놓고 침실로 갔다. 아침이면 다시 잠옷을 코타츠 안에 넣어두었다. 

“운동을 해 운동을. 그게 다 운동을 안 해서 그래.”

말은 참 정 없이 하면서도 남편은 매일 밤 주방용 기름난로를 거실로 옮긴 후 약하게 틀어두었다. 덕분에 나의 새벽은 매일 따뜻했네. 코타츠에 다리를 묻고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난로의 불빛을 바라보면 ‘아~ 행복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고도 몇 시간 후면 ‘아.. 안 맞아, 안 맞아.’ 투덜투덜 남편이 눈치채지 못하게 눈을 흘기겠지만 어쨌건 새벽만큼은 따스한 난로의 온기처럼 남편이 고맙고 고마웠다.

오고리의 날들은 대부분 행복했다. 그중 꽉 붙잡고 놓치기 실은 하나는 해방의 행복. 삼시 세끼로부터의 해방, 빨래와 설거지로부터의 해방, 살림 총책임으로 부터의 해방. 오고리에 온 날부터 빨래는 하지 않고 쌓기만 했다. 아침과 저녁은 남편이 전담. 온전히 나만의 것인 새벽과 아침이 얼마만인지. 새벽 5시에 기상, 글을 쓰고 메모를 정리하고 하루를 계획하노라면 어느 순간 남편이 일어나 아침준비를 시작했다. 냉장고 식재료 관리도, 장 보러 가서 찬거리를 결정하고 구매하는 일도 모두 남편이 도맡았다.

“열심히 써. 부지런히 쓰자. 건축은 성장의 폭에 한계가 있어. 그런데 글을 그렇지 않잖아.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어. (누가 그래? 누가?) 파이팅!”

자신의 아내가 조앤롤링이라도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인지, 오고리에 온 순간부터 쓰라고 쓰라고, 다른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쓰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오늘은 굿바이 오고리, 작별인사를 하는 날. 가야지 하다가 못 간 곳, 이미 다녀왔으나 또 가고 싶은 곳을 중심으로 일정을 계획했다. 시작은 미쿠니가오카 역 인근의 천 엔 샵.

“천 엔 샵? 처언~엔샵?”

천 엔 샵이 아닌 백엔샵의 표기가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끼리 결론짓곤, 가보기로 결정. 막상 도착해 보니 매장의 진짜 이름은 Siera. 매장 인테리어며 제품의 디자인과 퀄리티가 천 엔은  과하지만 백 엔이라고 하기엔 너무 훌륭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가격을 확인했다. 어머, 이게 무슨 일. 매장 내 모든 제품이 110엔이란다. 

매장의 모든 매대를 한 열 한 열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도시락 관련 상품 매대 1개를 다 본 후 주방정리용품으로 넘어가려는데 남편이 다가왔다. 

“전 제품이 모두 110엔인데 설마 모자라겠어?”

천 엔짜리 다섯 장을 건네고 남편은 Siera 옆 마트로 가 버렸다. 10분, 20분, 30분, 60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헉, 벌써?!’

“여보세요? 나 아직 많이 남았는데….”

“괜찮아. 이 마트 진짜 좋다. 도시락도 종류가 엄청 많고, 도시락 먹을 수 있는 공간도 따로 있어. 쇼핑카트 그냥 두고 와서 점심 먹고 또 구경해.”

아이에게 밥을 먹겠냐 물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또한. 쇼핑을 할 때며 먹지 않아도 배가 든든한 진귀한 경험을 남편은 아직 못 해본 걸까? 황홀했던 매장 구경은 60분에 다시 7분을 더해, 총 127분이 지나서야 끝났다. 이젠 진짜 구매할 물건을 결정할 시간. 매대와 매대 간격이 넓고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사각지대를 찾았다. 빈 바구니 2개를 바닥에 놓고 신중하고 신속하게 최종 선택 시~작. 오른쪽 바구니는 땡, 왼쪽 바구니는 딩동댕. 

“엄마, 설마 그걸 다 살 건 아니지?”

“안 그래도 네 도움이 필요했어. 엄마가 절대로 안 쓸 것 같거나, 우리집에 필요 없을 것 같은 것만 이야기해 줘.”

“엄마, 고슴도치는 아니야. 이렇게 그림이 있으면 예쁘긴 한데 그릇을 놓으면 예쁘지가 않아.”

“그래도… 고슴도치가 너무 귀엽잖아.”

“놉!”

잘 있거라, 고슴도치 테이블매트. 아쉽지만, 땡! 오른쪽 바구니행.

“엄마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 어디에 사용할 건데? 주방서랍? 아니야. 나는 싫어. 예쁘지가 않잖아.”

“서랍 안에 두고 쓸 거라니까. 서랍 닫으면 보이지도 않잖아. 이런 반투명한 걸 얼마나 찾았는데…”

“나는 싫어. 나는 맘에 안 들어.”

반투명 주방정리 트레이야 너도 땡! 오른쪽 바구니로.

“엄마 이거 뭐에 쓸 건데?”

“음… 너무 예쁘지 않니?”

“내 취향은 아니야. 엄마는 이게 예뻐? 예뻐도 쓸 곳이 없으면 사면 안 되지.”

“쓸 곳은 가지고 있으면 다 생겨.”

“엄마!!!”

오른쪽, 아니 왼쪽. 너는 그냥 딩동댕! 한번 보고 두 번 봐도 예쁜 걸 어떡해.

약 20%의 물건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은 후 계산을 하러 갔다. 삑 삑 삑. 우와, 진짜로 모든 물건이 110엔이로구나. 그런데 이런! 서둘러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빨리 이쪽으로 좀 와요. 빨리. 현금이 부족할 것 같단 말이야.”

“그러니까, 바구니 세 개가 전부 우리 거란 말이지?” 

남편이 고개를 절레절레. 그리곤 봉투는 왜 안 샀느냐고 물었다.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 휴대용 가방을 짜잔~ 2개 꺼냈다. 하나는 초등생 책가방 하나 정도의 물건이 들어가는 크기. 다른 하나는 전부 다 펼치면 기내용 캐리어에 담은 옷가지들을 몽땅 넣고도 약간의 여유가 남을 정도의 크기다. 

“이럴 줄 알고 이렇게 준비해 온 거야? 와… (이번엔 딸을 보며) 엄마는 다 계획이 있구나. 계획이 있어.”

계산을 마치고 난 후, 우리는 먹고 싶은 도시락을 하나씩 골라 마트 한편에 마련된 도시락 먹는 공간에 모였다.

“이거 먹고 되겠어?”

달랑 삼랑김밥 2개뿐인 내 도시락을 보며 남편이 말했다. 남편, 늦은 점심을 먹고 바로 지하철 타고 우리 동네로 돌아가면 ALES의 파르페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었습니꽈! ALES 파르페 하나는 웬만한 식사 한 끼. 즐겁게 음미하기 위해선 배를 비워두는 센스는 기본이지요. 살짝 아쉬운(배가 덜 찼음) 점심을 마치고 오늘은 어떤 파르페를 먹을지 즐거운 고민을 나누며 ALES로 향했다.

“나는 커피젤리 파르페.” 

“나는 계절 파르페. 딸기 파르페.”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할 메뉴를 정한 우리와 달리 남편은 꽤 오래 고민하더니 따뜻한 커피를 택했다. 쯧쯧쯧. 아이와 나처럼 아쉬운 점심을 먹었어야 했는데, 안타깝구려. 테이블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신의 손(모든 요리는 어머니인 이 분이 만드심)을 가진 주인아주머니는 웃으며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펼쳐 보였다. 맞아요, 맞아. 저희 두 번째 방문이에요. 어제가 휴무일만 아니었으면 어제도 왔을 거예요.

오늘의 파르페도 더할 나위 없었다. 아름다운 것은 당연했고 모든 요소요소의 균형이 절묘해 먹는 즐거움이 최고였다. 소프트아이스크림 위에 취향에 맞게 부으며 먹으라고 알려준 에스프레소 시럽은 향이 그만이었다. 소프트아이스크림에 살살 부어가며 신중하게 한 스푼 한 스푼. 커피젤리는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면 천천히 감미로운 커피 향이 입안을 채웠다.  커피젤리 아래 숨겨진 견과류는 고소함은 물론 씹는 재미까지.

한 스푼 한 스푼 더해질 때마다 우리는 소리를 낮춰 함성을 질렀다. 서로의 파르페를 한 스푼씩 돌아가며 떠먹는 모습을 주인아주머니와 딸은 안 보는 척하며 살짝살짝.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었다. 고마웠다. 아름다운 디저트도 더 아름다운 맛도. 휴대폰 번역앱을 열고 짧은 편지를 썼다.

“모든 메뉴가 아름답고 맛있었어요. 저희 가족은 내일 떠나요. 이 맛있고 아름다운 파르페가 많이 그리울 거예요. 내년 겨울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잘 지내세요. 좋은 디저트와 좋은 추억, 감사합니다.”

내가 건넨 핸드폰을 한참을 보던 딸과 아주머니는 나를 향해 더 환하게 웃으며 “아리가또오 고자이마스.” 했다. 그래서 나도 “아리가또오 고자이마스.” 아주머니와 딸이 다시 “아리가또오 고자이마스.” 이번에는 남편과 아이까지 셋이 함께 “아리가또오 고자이마스.”그렇게 고마움 가득한 안녕을 했다.

다음 목적지는 남편이 좋아한 초등학교 근처 초밥집 도코료히라타로. 이름이 어려워 나는 번번이 ‘초등학교 초밥집’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남편은 단번에 외웠지. 도코료히라타로.

언제 그런 건 또 준비한 거지? 남편은 일본어와 뜻과 한글 일본어 발음이 써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곤 제법 능숙하게 모둠 초밥을 주문했다. 슬슬 배가 불러올 즈음 모둠회 추가. 기분 좋게 나마비루(생맥주)도 함께였다. 주인 할아버지가 주문한 모둠회와 함께 성게초밥 한 점을 건네며 아이를 가리켰다. 아마 아이에게 주라는 뜻인 듯. 고개만 꾸벅 숙이는 아이의 맞은편에서 남편과 내가 큰 소리로 아리가또오 고자이마스. 아이에게 주신 성게초밥에는 판매용 보다 훨씬 많은 성게가 들어있었다.

“기억해 주신 것 같지? 우와, 너무 감동이다.”

미키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도코료히라타로가 있었다고 했다. 사실 동네에 맛있는 초밥집이 한 곳 더 있었는데 (심지어 우리의 오고리 집 바로 근처였다고) 몇 해전 주인어른이 70세가 되면서 문을 닫았다 했다. 남편과 나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참치를 먹으며 도코료히라타로가 오래오래 건재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도 역시 핸드폰 번역앱을 이용해 짧은 편지를 썼다. “건강하세요”라고 쓰는데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점점 더 진짜 할아버지에 가까워지는 울 아빠 생각도 났다. 혹시나 핸드폰의 글씨가 작아 잘 보이지 않을까 봐, 핸드폰 볼륨을 최대로 높여 메시지와 함께 들려드렸다. 할아버지께서 활짝 웃으시기에 나도 덩달아 활짝. 

그렇게 다섯 번째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양해 구합니다*

오늘(1월 21일) 늦은 저녁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때문에 마지막인 <여섯 번째_어슬렁>은 2023년 1월 22일에 야간배송 될 예정입니다. 다섯 밤 여섯 날 동안, 덕분에 매일 부지런히 기록하고 썼습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어슬렁 마지막

알레시. 도코료히라타로, 레브더베베.

뇨이린지, 이원, 시에라, 미쓰사와, 키야마…

오고리에서 만난 이름들.

후쿠오카현 오고리시. 여행지를 정한 후, 오고리는 내게 줄곧 추상화였다. 어떤 여행책자도 오고리에 대해  들려주지 않았다. 관련 정보라곤 개구리절로 알려진 뇨이린지 정도. 그래서 궁금했고 그래서 불안했다. 

가 보지 못한 나라, 가 보지 않은 도시로 여행을 준비할 때면 20대 시절 소개팅이 생각난다. 상대의 이름/나이/직업 그리고 주선자가 들려준 이야기. 몇 안 되는 정보를 토대로 상대에 대해 상상하고 기대했지. 상상만 하던 상대를 실제로 만나면 결과는 둘 중 하나. 애프터 신청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다섯 밤 여섯 날을 보낸 오고리는 더 이상 추상화가 아니다. 집 앞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나타나는 철길을 따라 쭉 뻗은 도로.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면 노부부가 하는 타코야끼 가게를 만날 수 있다. 이 가게의 타코야끼는 아이와 남편이 좋아했고, 나는 야채 듬뿍 야끼소바를 더 선호했지.

더더더 위로 올라가서 오른쪽의 횡단보도를 지나면 미쓰사와 역. 미쓰사와 역을 지나 쭉쭉쭉 걸어 올라가면 알찬 구성의 880엔 런치 세트로 점심이면 동네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초밥집 도코료히라타로가 있다. 도코료히라타로를 지나 쭉쭉쭉 쭉쭉 직진을 하다가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 언덕길을 오르면 오고리 디저트 거리(?)가 펼쳐진다. 아쉽게도 가 보진 못 했지만 맛이 좋다고 알려진 스콘집과 애프터눈 티세트가 실하다는 카페도 여기에 있다. 언덕의 끝에는 뇨이린지가 있고 뇨이린지 입구에는 슈크림볼이 더할나위 없는 레브더베베가 있지. 이제 오고리는 내게 모든 것이 선명한 정물화다.

돌아가는 비행기 출발 시각은 20시 35분. 일찌감치 여행가방을 꾸린 후 아이와 함께 도보 17분 거리 이원(쇼핑몰)으로 향했다. 낯선 나라의 쇼핑몰은 사방이 볼거리. 사야 할 것 없어도 신나고 들뜬다. 

“엄마, 저대로 한번 입어보고 싶은데…”

번역앱을 이용해 아이가 한 말을 그대로 직원에게 전했다. 옷은 아이에게 잘 어울렸다. 거기에 매장 내 스타일링 그대로 비니까지 착용하자 (엄마인 내 눈에는) 패션지 모델처럼 근사했다. 

“아이가 입고 가겠다고 하네요. 모두 계산해 주세요.”

앞서 살펴본 몇몇 옷가게의 가격표를 확인한 터라 비슷한 가격대겠지라고 짐작해 버린 것이 실수. 티셔츠와 청조끼 그리고 비니. 세 아이템의 가격이! 

‘에잇. 남편 카드 가져올걸.’

‘진짜로 돌아가는구나.’ 

여행가방이 놓인 거실을 보니 그제야 오고리를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코타츠에서 보내는 마지막은 미키가 준비해 준 디저트와 녹차. 도란도락 미키와 함께 오고리에서의 여섯 날을 추억하며 행복했던 시간을 마무리했다. 

“이상하네요. 왜 버스가 안 오지요?’

17시 24분 공항행 버스를 타야 하는데 25분, 26분이 되어도 버스는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실시간 버스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전광판에도 해당 시간의 공항행 버스는 없었다. 그때 남편이 정류장에 붙은 게시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버스 운영 스케줄이 변경된 것 같은데…”

놀란 얼굴의 미키는 미안해 어쩔 줄 몰라했다. 다행히 출발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18시 16분 버스를 타기로 결정. 우리는 미안해하는 미키를 안심시켜 먼저 돌려보냈다. 

’18시 16분 버스라… 빠듯한데.’

걱정이 되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설마 별 일이야 있겠어라는 마음으로 정류장 뒤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도착 예정 시간인 18시 16분을 지나 18분, 20분, 25분. 버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30분, 31분, 32분. 

‘설마 이러다 비행기를 놓치는 사태가… 지금이라도 택시를 부를까?’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버스가 멀리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우리는 쫄깃한 마지막을 경험하며 공항에 도착했고 무사히 돌아왔다. 

“제가 좋아하는 오고리를 사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또 다른 계절에 놀러 오세요. 그때는 아키즈키라는 오고리 다음으로 좋아하는 장소를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좋은 새해를 보내세요.” – 미키가 보내준 작별 메시지

여행은 끝났지만 소중한 인연이 남았다.

여행은 끝났지만 아름다운 기억이 남았다.

여행은 끝났지만 여섯 개의 어슬렁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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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툴고 부족했던 어슬렁을 이만 마칩니다.

다섯 밤 여섯 날의 ‘오고리 여행’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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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es

小畜 亨 密雲不雨 自我西郊. 작은행복을 얻는 데도 힘차고 강렬한 노력이 필요하다. 가정의 행복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쉽게 생각하여 몸과 마음이 가정에서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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