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달에 가장 친한 후배가 결혼을 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교수님이 주례를 보셨고
..
나는 식장에 늦어 주례사를 듣지는 못했으나 다행이 교수님 홈페이지에
주례사가 올려져 있었다.. 가끔씩 읽어보며 둘이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느끼게 한다.
<삼경이와 정호가 어제 2004년 5월 9일 결혼을 했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 주례에 나섰습니다. 결혼은 두사람만의 일이 아닌 세상 모든 사람의 일입니다. 저는 그래서 주례사를 여기에 올립니다. 앞으로 제가 언제 또 주례사를 하게 될지는 모르나 혹 그렇게 되면 저는 삼경이와 정호가 살아가는 모습을 다음 주례사의 내용으로 삼고자 합니다. 결혼식에 참예 못한 사람들을 위해 여기에 주례사를 그대로 싣고자 합니다. 독일로 신혼 여행을 떠난 삼경이와 정호도 이것을 찬성하리라 봅니다>
사랑을 이루는 길은 禮 로부터
0. 오늘의 주인공은 삼경이와 정호, 정호와 삼경이입니다. 삼경이와 정호는 제가 사랑하는 제자요 자식입니다. 삼경이는 연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차를 몰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 차안에는 아버지가 쓰시던 물건들이 아직도 그대로 있습니다. 정호는 누가 청주 양반 가문 자제 아니랄까봐 늘 무게를 재고 다닙니다. 정호의 부모님을 오늘 뵈니 그 무게가 더욱 느껴집니다. 무게라면 삼경이도 한 몫 합니다. 한없이 맑고 귀여운 삼경이의 얼굴을 근엄하게 지켜주는 꼿꼿하신 삼경이의 할아버님이 늘 뒤에 지키고 있습니다. 정호는 그래도 늘 다사롭습니다. 뜨문뜨문 던지는 말 가운데 삼경이에 대한 속내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삼경이 어머님은 아마 그 모습에 반해 이쁜 딸을 아낌없이 내 주는가 봅니다.
1. 삼경이와 정호가 오래 전부터 주례를 서 달라고 막무가내 떼를 썼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저는 난생 처음 이렇게 결혼 주례에 나섰습니다. 신랑신부의 마음이 떨리고 장한 아들과 이쁜 딸을 장가보내고 시집보내는 어버이의 마음이 떨리겠지만 저 역시 떨립니다. 삼경이와 정호, 정호와 삼경이는 저와 한 울타리 안에서 정답게 놀던 소꿉놀이 짝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소꿉놀이가 아닌 어른놀이 짝꿍으로 맺어달라고 하니 떨릴 수밖에요. 이젠 진짜로 밥을 짓고 밭을 갈고 아이를 낳아서 길러야 하는 짝으로 맺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떨리고 두려운 마음 보다는 기특한 모습에 그만 마음이 들떠 청을 들어주고야 말았습니다.
2. 도대체 무슨 얘기를 들려주어야 하나 하고 주례 청을 받은 후 내내 생각에 젖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는 용기를 냈습니다. 내가 살아 온 결혼이야기를 들려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이 화사한 날에 부부 싸움한 얘기만은 빼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의 신혼부부와 여러 하객들은 이왕이면 즐거운 얘기를 듣고 싶어 할 테니 말입니다.
3. 제가 들려주고자 하는 저의 사랑이야기는 사실 저의 아내에게 하는 사랑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가 주례를 난생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니 굳이 저의 아내와 딸아이가 같이 나셨습니다. 쑥스럽기는 하지만 아내와 딸아이는 이제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저와 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는 운명이지요. 마누라와 자식 자랑하는 일이야 팔불출의 하나임이 분명한데 그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그러고 산다는 것이겠지요. 어쨌든 저는 오늘 저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저의 아내에게 하는 사랑의 고백이야말로 오늘의 신랑 신부 삼경이와 정호, 정호와 삼경이에게 들려 줄 가장 좋은 주례사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4. 요즘도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옛날 학생들의 교양 필독서의 하나로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영어 제목이 Art of Loving이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을 때는 책 제목의 번역을 놓고도 사랑의 예술인가 아니면 사랑의 기술인가 하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아마 요즘에는 거의 기술로 굳어진 것으로 압니다. 저도 꽤 재미있게 그 책을 읽었는데 제가 생각하기로도 그 책의 제목은 당연히 사랑의 예술이기보다는 사랑의 기술이었습니다. 왜 그러한가는 이 책 1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즉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그저 막연히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배울 것이 뭐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막연한 생각을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우선 사람들은 사랑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사랑받기 위해 돈을 벌어 폼을 잡고 여자들은 몸매를 가꾸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사람들은 사랑을 사랑하는 ‘능력’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만 앞에 나타나기를 애써 기다릴 뿐입니다. 마지막 오해는 사랑을 처음 느끼게 되는 일과 계속 사랑하는 일을 같은 것으로 혼동하는 것입니다. 일단 한번 사랑을 얻으면 그만인 셈입니다. 콩깍지가 한번 씌우면 절대로 벗겨지지 않는 다고 믿는 것입니다. 프롬은 이런 생각들 때문에 사람들이 사랑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사랑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던히 사랑하는 법에 대해 공부하고 배운 대로 실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한다고 설파합니다.
5. 너무 고전적인 얘기인 것 같지만 실제로 우리는 이 일이 그리 쉽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오월의 신부가 되는 삼경이와 오월의 신랑이 되는 정호를 위해 교과서적인 교훈을 들려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교과서를 읽어버렸는데 어쩝니까? 직업병이 또 도진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그것은 교과서가 아니고 제 사랑 얘기의 시작입니다. 사실 교과서에도 재미난 얘기가 가끔은 있으니 조금만 참아보시기 바랍니다.
6. 저는 이 책을 대학교 1학년 때인가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저는 사랑을 하는가 마는가 사랑은 무엇인가 등등의 보통 젊은 사람들의 번뇌에 가끔씩 빠져들 때였던가 봅니다. 그런데 프롬이 사랑은 기술이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알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에 제법 감동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들을 잊지 않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물론 수 없이 잊어먹었지만 생각이 나면 또 애써보았습니다. 에릭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기술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 만난 연인들이 서로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들을 떠 올려보는 것입니다. 데이트를 하러 나갈 때의 그 설레임과 망설임, 그리고 옷 매무세를 고치고 들려 줄 즐거운 이야기들을 생각하고 소중한 선물을 준비하는 그런 모습들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그대가 좋아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사실 이 일은 정말 괴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결혼사기극을 벌이는 사기꾼이 용의주도하게 준비할 때 그 사기꾼의 마음은 참으로 괴로운 것처럼 연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괴로운 일입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도 모두 다 경험한 일일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은 거짓말입니다. 사실은 사랑을 얻기 위해 거짓으로 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평생을 거짓으로 주더라도 그대가 내게 속아주기만 한다면 그만이라고 말입니다.
7. 그렇습니다. 저는 참으로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잃어야 했습니다. 저는 혼자서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저의 아내는 늘 저를 밝은 곳 소란스러운 곳으로 이끌어냈습니다. 저는 시골에 살고 싶었는데 저의 아내는 저를 도시로 불러냈습니다. 저는 수수하게 입고 다니고 싶었는데 저의 아내는 화려하게 저를 입혔습니다. 저는 속으로 싫지만 겉으로 좋아하는 척 했습니다. 그런데 살고 보니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저도 아내처럼 밝은 곳 소란스러운 곳 도시를 좋아하고 화려한 옷을 입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더 깜짝 놀란 것은 아내도 저처럼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밝고 소란스러운 것을 좋아하면서 조용한 곳에 저와 함께 있어야 했고, 도시를 좋아하면서도 시골에 사는 법을 배워야했고, 화려한 옷보다는 수수한 옷을 입게 되었답니다. 속으로 안 그러면서도 저 때문에 많을 것을 버리고 겉으로만 억지로 그러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저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 이렇게 조금 깨달았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될지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아내와 제가 좋아하는 것은 사실 처음부터 똑 같은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내와 저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다 같이 좋아하는 것들일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좋아하는 것들은 사실 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모습대로 만들어가는 것들인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무엇을 정말로 좋아하는지 모를 것입니다. 그냥 어린아이처럼 떼만 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의 아내는 그건 그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화가 나지요. 그러나 나중에 보면 저의 아내가 옳았지요. 엄마의 말이 옳은 것처럼 말입니다.
8. 저는 아직도 아내가 제일 무섭습니다. 주눅 들려 무서운 것은 아닙니다. 무섭지만 그것이 크게 괴롭지는 않습니다. 데이트 장소로 나갈 때의 그런 설레임처럼 무서울 뿐입니다. 아마 어쩌면 죽을 때까지는 그렇게 무서워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무서움보다는 안심을 찾는 방법입니다. 내가 찾아나서는 것보다는 아내와 함께 아니면 아내가 찾아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편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사랑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가 어른 앞에 예의를 표하는 것도 그런 일인 것 같습니다. 에릭프롬이 사랑은 기술이라고 했는데 저는 사랑은 예의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뭐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람 살아가는 이치일 뿐이지요. 어른들 앞에 예를 다하고 친구 앞에 의리를 지키고 선생님 앞에 존경을 표하고 자식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일들입니다.
9. 다시 에릭 프롬의 경구를 생각해봅시다. 처음 사랑에 빠지는 일과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이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콩깍지는 금방 벗겨집니다. 벗겨지고 나면 정말 다행이라고 휴 하고 숨을 몰아 내쉽니다. 마치 결혼사기극을 벗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콩깍지는 원래 벗겨지려는 속성을 지닌 것이어서 바보 같은 노력을 하고 일부러 쓰고 있지 않으려면 금방 벗겨지고 맙니다. 노력을 가하지 않으면 금방 벗겨지고 맙니다. 그래도 연애하다 결혼에까지 이르는 신혼부부들은 제법 노력을 많이 한 편입니다. 오늘 삼경이와 정호, 정호와 삼경이도 그런 점에서는 제법 사랑하는 법을 실천해 온 셈입니다. 저는 압니다. 꼭 옆에서 보아서 알았다기 보다는 저의 경우를 통해서 미루어 짐작해도 뻔히 압니다. “말어 ?” 하는 질문을 수도 없이 했고 때로는 “우리 예서 그만 둘까?” 하고 싸운 적도 많았을 겁니다. 그래도 제법 노력한 결과 제법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고 겉으로나마 짐짓 속아주는 척 해서 여기까지는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결혼까지 했으니 앞으로는 탄탄대로가 열린다고 하면 정말 큰 오산이라고 에릭프롬은 얘기합니다. 처음 만날 때의 설렘과 갖은 꾸밈이 없이는 콩깍지는 금방 벗겨지고 만다고 합니다. 여기 살아 온 많은 어른들은 다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열매가 여기 오늘의 신랑신부를 낳고 또 이들은 더 아름다운 생명을 이어갈 것입니다. 이것을 일런 천륜이라 하고 하늘의 이치라고 합니다. 사람이 짝을 맺어 사는 일이 세상의 가장 큰 이치라는 뜻입니다. 그런 큰 이치는 그냥 작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즐겁고 아름다운 것임을 우리는 어려서부터 알아왔습니다. 소꿉놀이가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그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다만 그런 아름다움은 가꾸어가는 것이지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10. 우리 오늘 다 같이 삼경이와 정호, 정호와 삼경이를 축하합시다. 그리고 이 두 짝꿍이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는가 지켜봅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할 수 있는가 늘 공부하고 노력하는가 지켜봅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저는 부탁하려고 합니다. 저에게 주례를 부탁한 것은 제가 선생님이었기 때문으로 압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으로 훈계합니다. 사랑하는 법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라고 말입니다. 공자님께서 배우고 익히는 일이 즐거움이라 했으니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면 즐거움이 따를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 분 정말 다시 한번 축하를 드리고 꼭 열심히 공부하여 행복하십시오. 감사합니다.